일상/2013~2019

집 열쇠를 잃어버린 이야기.

참참. 2013. 5. 12. 18:49

일주일 전까지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길놀이를 하게 됐다. 2013년 연등회 연등축제에서 5월 11일 토요일날 연등행렬(퍼레이드)을 따라가는 풍물패 길놀이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일주일 전 일요일, 마라톤을 함께 뛴 선배들과 학교에 놀러갔다가 후배의 부탁을 받은 것이 일의 시작이었다.

화요일 즈음, 후배들 공연연습에 끼어서 정말로 오랜만에 장구를 메고, 가락을 쳐보았다. 생각처럼 잘 되지가 않아서 어렵기도 했지만, 신이 났다. 1, 2학년 때 나름대로 열심히 할 때보다 더 재밌었던 것 같다. 한참을 치다보니, 전에는 굳은 살이 박여 까지지 않았던 새끼손가락이 까져서 상처가 났다. 상처가 아물 때까지는 좀 조심하기로 하고, 어제인 토요일까지 얌전히 있었다. 상처는 꽤 아물었지만 다 낫지는 않았고, 그 상태에서 다시 길놀이를 하자 결국 내 새끼손가락의 운명은.

(이 날 나 말고도 여러 후배들이 손에 상처를 입었다. 북 치다가 손바닥에 물집 잔뜩 잡힌 13학번 아이를 보니, 내가 사물놀이에서 북 친다고 연습할 때 온 손가락 온 손바닥에 다 물집 잡혔던 거랑 정말 비슷한 모습, 윽. 안타까웠다.)

하지만, 무척이나 즐거웠다. 두 시간이 넘는 긴 연등행렬동안 치느라 지치기도 했지만, 구경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앞뒤에서 함께 흥겹게 놀아주시는 아주머니들, 함께 악기를 치고 있는 선후배들과 어우러져 아픈 것도 잠시 잊고 신나게 쳤다. 외국인들이 구경하고 있으면 괜히 더 힘껏 치기도 하고, 앞사람과 거리가 벌어지면 뛰면서 치기도 하면서 놀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장구를 쳐본 건 처음인 것 같다.

연등행렬은 동국대에서 출발하여 종로거리를 지나갔는데, 아무래도 다시 동국대로 돌아올 수가 없기 때문에 공연복을 입고나서 벗은 옷들과 개인 짐들은 다 맡아서 차로 날라주셨다. 나는 맨 마지막에 와서 급하게 옷을 갈아입고, 짐도 다 같이 맡기질 못해 따로 비닐봉지에 맡겼다. 그런 가운데 집 열쇠는 청바지 주머니에 든 채로, 그냥 봉지에 넣고 '떨어져봤자 봉지 안에는 있겠지'하는 마음으로 급하게 맡겼다. 신나게 길놀이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는데, 청바지를 입고나서 주머니를 뒤져보니 열쇠가 없다. 옷이 들어있던 비닐봉지를 먼저 털어보고, 옷 갈아입던 곳과 거기까지 청바지를 들고 다녔던 곳도 둘러봤다. 그 봉지를 처음 건네받은 곳과 짐을 실어두었던 차 안도 찾아보았는데 안 보인다. 음, 그렇게 집 열쇠와 작별을 하게 됐다. 아버지가 고향인 강릉에 내려가셔서 집에 들어갈 수가 없지만, 어차피 학교 후배들 자취방이 있어서 잘 곳은 많았고, 나도 내일 강릉으로 내려갈 생각이어서 별로 걱정되진 않았다. 걱정을 많이 해주셔서 무척 고마웠다.

다들 지쳤지만 마무리하며 맥주를 마실 생각을 하면서 지하철역으로 가는데, 전통예술공연 일환으로 선반 사물놀이 공연을 하고 있었다. 진짜, 풍물을 직접 쳐본 우리들은 감탄사를 절로 내뱉으며 열심히 근처로 뛰어갔다. 관객들 뒤에서 그 틈으로 열심히 보는데, 다들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와-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워낙 잘 치고 잘 노니 정말 신명이 나더라. 사실, 풍물패 공연을 하면 공연을 하는 우리들은 재미있는데 보는 사람은 크게 재미없는 경우가 많다. 특히, 그런 악기를 쳐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별 흥미를 못 느끼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는 시끄럽게만 들리기도 한다.

소리가 크기 때문에 관심없는 사람들이 소음이라고 느끼는 건 어쩔 수 없고, 그 사람들이 나빠서 그런 것도 아니다. 다만 정말 아쉽기는 하다. 조금 배워보고 접해본 사람들은, 이 맛을 안다. 흥겹고, 신나고, 함께 어우러지는 기분좋은 느낌. 그 느낌을 알고 있다는 게 참 축복인 것 같다. 예전에 선배들한테 들었던 이야기가, 보는 사람까지 함께 즐겁게 만드려면 실력이 있어야 한다는 거였다. 이번에 종각역 앞에서 선반 사물놀이를 보면서 느꼈다. 이렇게 신나는 구나. 그리고, 그 신나는 기분과 함께 그 사람들의 실력에 대해 감탄할 수 있는 경험이 내게 있음이 참 고맙게 느껴졌다.

위에 한 이야기는 사실, 풍물 아니라 어디에 적용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어느 음악 장르, 어느 악기라도 그걸 직접 해본 사람이 관련 공연을 볼 때, 몰입도와 이해도가 월등하게 높을 수밖에 없다. 그 상태에서만 느낄 수 있는 추가적인 즐거움도 있다. 물론 너무 많이 알면 어떤 건 좋은데 어떤 건 못한다느니, 평가를 하면서 몰입과 즐거움을 오히려 방해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또한 보는 사람들까지 함께 감동하고 즐길 수 있으려면 실력이 좋아야한다는 것도 어느 분야를 가도 마찬가지 이야기. 못하는 공연은 하는 사람은 재미있을 수 있지만 보는 사람에게는 고통이 되기가 쉽다. 음악 아니라 미술이나 만화, 소설이나 기사나 그 외에 모든 글도 마찬가지로 이 모든 것이 적용되는 지점들이 있다라는 생각. 그렇지만, '실력'이 만능은 또 아니다. 실력이 조금 덜 하더라도 하는 사람이 온 진심을 다해 즐기고 있을 때, 거기서 전해지는 전염병 비슷한 즐거움과 묘한 감동도 있다. 좋아해서 열심히 하다보면 잘해지기도 하니까, 결국 두 개가 완전히 분리된 것은 또 아니다.

여튼, 제일 중요한 건 역시 진심으로 즐기는 거 아닐까?

종각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는 우리 풍물패 사람들. 얼른 가서 맥주를 마시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수원까지 가는 길은 그리 쉽지 않았다. 워낙에 멀기도 하고, 신도림에서 밀려들어오던 그 많은 사람들이란.

학교에 도착해서 악기만 대충 정리해두고, 치킨을 먹으며 맥주를 마셨다. 서로에게 수고했다고 하며 오늘의 즐거움을 나누는 자리, 행복했다. 행복이 뭐 별건가. 내가 그 자리에 함께 있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비록 새끼손가락은 까지고, 집 열쇠는 잃어버렸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 아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