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13~2019

비오는 토요일 아침 산책.

참참. 2013. 5. 10. 11:09


비오는 토요일 아침 산책.


일찍 잔 탓일까, 여섯시에 눈이 떠졌다.

왠지 오랜만인 듯한 상쾌한, 아침을 맞았다.

머리는 조금 무거웠지만, 체한 것은 거의 다 나았나보다.

 

냉장고에서 남았던 밥을 꺼내 또 죽을 끓였다.

자꾸만 찬장에 있는 라면이 눈에 들어온다. 아직은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점심에는 라면을 먹어도 괜찮으려나? 누구도 답해줄 이 없다.

 

조금이나마 맛있으라고 소금을 살짝 쳤지만, 아무 맛도 안 났다.

열심히, 그러나 많이는 못 먹었다. 그냥 약을 먹었다.

 

어제 좋았던 기억 때문인지, 바람을 쐬고 싶어 나갔다.

그랬더니 비가 온다. 거실에도 큰 창이 있는데 어찌 몰랐을까 싶다.

'비가 오는 분위기도 좋지'라는 생각이 들어 우산을 들고 다시 나갔다.

 

개나리, 진달래가 군데군데 활짝 피었다.

사진이 없는 것은 손전화를 집에 두고 갔기 때문이다.

 

오늘도 아주 천천히 걸었다.

어제 앉았던 벤치까지 왔는데 다 젖어서 앉을 수는 없었다.

그냥 그 앞에 서서 가만히 앞을 바라보며 사색에 빠지려는데,

어젠 어두워서 안 보이던 쓰레기가 잔뜩 보였다.

 

정말 분위기 깨는 녀석들이었다. 집중도 안 되고.

흙을 살짝 덮고 있는 비닐봉지는 마치 여기에 쓰레기를 담으라는 듯 했다.

어쩔 수 없이 주워담기 시작했다. 한 손엔 봉지를 들고, 우산은 어깨와 목에 걸쳐놓고.

 

먹고 버린 요구르트병, 맥주캔과 페트병, 과자봉지. 소주병은 도저히 주울 엄두가 나지 않는군.

주운 것들 가운데에는 전구도 있다.

다른 녀석들은 가져와서 먹고 버렸다고 친다면 너는 어쩌다 여기까지 왔니?

그 사연이 문득 궁금해졌다.

 

손도 더러워지고 바지에도 흙이 좀 묻었지만, 씻으면 그만이다.

그게 곧 '나'가 더러워진 건 아니니까.

스스로 그렇게 판단하고 옭아매지 않는 한 '나'는 절대 더러워지지 않는다.

내가 더럽지 않으니까 더러운 것들을 치울 수 있는 것이다.

어디선가 그런 글들을 읽었지. 아마, 맞는 이야기 같네.

 

내려오는데 어떤 아주머니께서

"어이구 좋은 일 하셨네, 비도 오는데. 젊은 사람이."

라고 하셨다. 기분이 좋다.

 

그런데 문득, 정말 좋은 일일까?

안좋은 일일 것까지는 없지만,

이 쓰레기들은 결국 어디로 가는 걸까?

 

내가 주워와서 산이 아니라 쓰레기통에 버린다고 해도,

재활용되는 건 그나마 다행이지만 나머진 결국 쓰레기매립장으로 가겠지.

이곳이 아니라 다른 곳이 더럽혀질 뿐이라면, 결국 그곳도 같은 지구라면.

결국 쓰레기를 최대한 만들지 않고, 최대한 재활용하는 수밖에 없나.

 

차라리 쓰레기를 우리 눈에서 가까운 곳에 계속 두면,

사람들이 정말 위기의식을 느끼고 쓰레기를 줄이지는 않을까?

별 생각이 다 든다.

 

막상 쓰레기가 든 봉지를 들고 내려오니,

분리수거통이 날 기다리고 있다.

종이, 플라스틱, 병, 캔.

쓰레기를 괜히 주워온 걸까? 산에서 가져온 게 어디야, 분리수거까지 내가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거기에 그런 쓰레기통이 있다면 분명히 그걸 관리하고 비우는 사람도 있겠지.

내가 이걸 그냥 버린다면 그 사람이 결국 다시 이걸 분리수거해야겠지.

그 사람은 얼마나 짜증이 날까.

내 좋은 일이 누군가에게 나쁜 일이 되는 순간이다. 차라리 이런 생각까지 안 했으면 좋았을텐데.

시작이 반이라면, 마무리가 1/3 정도는 될지도 모른다. 쉽지 않다.

 

결국 분리수거를 시작했다.

맥주 캔, 맥주 페트병, 요구르트병, 생수병을 분리수거하고 나니,

갑자기 막막해졌다. 플라스틱에는 페트병류만 들어있는데,

비닐을 어디에 버려야할지 모르겠는 거다. 일반쓰레기라는 분류도 없고.

살펴보니,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종이 통을 일반쓰레기 겸용으로 쓰고 있는 듯하다.

나도 이젠 포기하고 남은 쓰레기들은 종이에 모두 넣어버렸다.

 

쓰레기 주운 일 마무리도 어렵지만,

글을 마무리하는 일도 역시 쉽지 않다.

애초부터 두서도 없는 일기같은 글,

무슨 주제가 있고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 마무리까지 필요하겠느냐만은.

봄비를 맞고 있는 진달래와 개나리, 싱그러운 봄날의 아침.

오늘의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 정도로 해두자.

 

컴퓨터 끄고, 손전화 놓아두고 집밖으로 나가면

곧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어제오늘의 동네 뒷산 여행이었다.


* 이 글은 2013년 4월 6일에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