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라는 책읽기/바라는 삶을 위한 생각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참참. 2013. 5. 9. 16:19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저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출판사
이레 | 2009-01-29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나누기, 그리고 나란히 누워 있기.....
가격비교



책 읽어주는 남자는 아니지만, 작은책을 만드는 남자인 안건모 선생님과 불광문고에 갔다가, 선물받은 책이다. 엄밀히는 유이분 선생님께서 선물해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다른 이야기할 거리도 많지만, 한 여인과의 첫사랑이 열다섯 살이던 한 남자의 삶에 미친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물론 그 사랑의 이야기는 전쟁에 가담했던 세대와 그 다음 세대간의 갈등 등을 담은 이야기지, 단순한 사랑 이야기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 사랑의 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무척이나 강렬하게 다가왔다. 끊임없이 되돌려 떠올리게 되는 사랑의 경험들, 그것들을 안고 산다는 건 아름답기도 하지만 실은 참 피곤한 일일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내내 추억하는 그 경험들을 두고서도 나는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한 건지, 또 그녀는 진정으로 나를 사랑했던건지 확신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자들과의 관계에서 온전히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끊임없이 또 첫사랑을 떠올린다.

도대체 사랑이란 게 뭘까? 알 것 같다가도 여전히 모르겠는 것이 사랑이라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한 쌍의 커플이 오직 단 한사람의 상대에 대해 낭만적인 사랑을 한다는 개념은, 역사적으로 생긴지 얼마 안 되었다는 말도 있다. 요즘은 온갖 매체에서 나오는 아주 많은 이야기들이 사랑 이야기다. 그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의도 많고 낭만적인 말도 많다. 어떠어떠한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어떠한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렇게 많이도 이야기하고 보고 듣고 읽어도 아리송하다. 그게 대체 뭘까?

소설을 보면, 주인공이 삶 전체에서 가장 강렬한 행복감을 느끼는 시간은 바로 첫사랑의 그 몇 주다. 평생에 걸쳐 그 시간들을 추억하고 또 추억한다. 물론 소설과 현실은 다르고, 소설 속 그 주인공도 책에 언급되지 않은 삶의 여러 순간들에서 행복들을 분명히 꽤 많이 경험했을 거다. 분명히 그럴 텐데도 그 어린 시절의 경험들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듯 보인다. 그게 이상할 수도 있는데, 또 그리 이상하지도 않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어떤 처음들은 우리 삶에 너무나도 강렬하게 그 흔적을 남기곤 하니까. 그건 성숙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특별히 못나서가 아니라, 그냥 어쩔 수 없는 종류의 일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무덤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녀온 뒤, 그는 이제 전보다 자유로워졌을까? 행복해졌을까?

 

사랑 이야기는 이쯤 하고, 마음을 사로잡은 문장을 돌아보려 한다.

"나는 이해와 유죄 판결, 이 두가지에 대해 나름대로 입장을 취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 두가지를 동시에 할 수는 없었다."(170쪽)

한나는 나치시절 여자감시원으로 일하면서 범죄를 저질렀다. 자의로 여자감시원이라는 직업을 택했으며,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죽게 될 사람들의 명단을 결정했고, 다음 세대 사람들이 보기에 구할 수도 있었던 사람들을 구하지 않고 타서 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법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그 재판에 참여하고 있던 주인공은 당연히 유죄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그 여자는 한나였고, 그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쉽게 유죄판결을 내릴 수가 없었다. 홀로 가까운 수용소에 찾아가 그 시설들에 머물렀을 피해자들의 고통을 상상해보기도 하고, 한나가 했던 행동들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이해해보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녀와 그녀의 범죄를 진정으로 이해해보려는 시도와 그에 대한 유죄판결은 도저히 함께 있을 수 없다고 느낀다. 죄라는 것의 애매한 지점, 특히 전쟁범죄의 애매한 지점이 있다는 걸 지적한 것일까. 나는 누군가를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절대 그를 쉽게 미워할 수 없을 거라는 다소 개인적이고 감상적인 느낌으로 읽었다.

 

"재판 내내 끔찍한 일을 접할 때마다 따라다녔던 그 마비증세가 지난 2, 3주 동안 겪은 느낌과 생각들 위로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이것에 대해 내가 기뻐했다고 말하면 지나친 말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옳다고 느꼈다. 그것은 내가 일상으로 돌아가 그 일상 속에서 계속해서 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174쪽)

여기서 말하는 '마비증세'라는 것에 대해 꽤 여러 번 길게 언급이 된다. 요약하자면 재판에 참석한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 범죄의 내용들에 대해 경악을 하고 격렬한 감정을 느끼지만 나중에는 그 끔찍한 것들에 마비가 된다는 것이다. 점점 그 내용들을 들으면서도 웃으며 옆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둥 마비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특별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누구나 주인공 자신도 포함하여 다 마비되고 있다고 말을 한다. 그런 현상들이 사실 그리 특이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친구들에게 고통스러운 전기충격을 주는 심리 실험에서도 나중엔 점점 더 세게 줄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유명한 결과도 있지 않은가. 우리 사회에서도 학생이 성적 때문에 자살하는 것은 10년 전에는 굉장한 이슈가 되었고, 충격적이라는 반응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냥 그저 그런 일이지 않은가. 끝도 없는 무자비한 경쟁을 내면화한 아이들이 저지르는 충격적인 범죄들을 보라. 점점 더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같은 반 친구를 감금하고 며칠을 두들겨 패다가 죽이고 암매장하는 사건도 터졌다. 욱하는 심정에 순간의 실수로 죽게 만든 것도 아니고 며칠을 가둬놓고 팼다는 것은, 맞는 아이의 고통에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런 것들이 다 나치에서 수용소에서 같은 인간에게 차마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일상적으로 했던 사람들이 겪은 '마비증세'와 비슷한 것 아닐까?

그렇게 대단한 폭력적 상황에 유출된 것도 아니고, 그저 재판하는 것을 구경하며 말로만 듣는 사람들도 그 사건의 끔찍함에 마비가 된다. 그것이 주인공이 소설에서 하는 이야기다. 자신도 마비가 되었으며, 이 문장에서 말하듯, 그 마비증세가 일상 속에서 계속해서 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거다. 사실 그런 감각들을 마비시키지 않고 그 끔찍함을 계속해서 느끼면서는 제정신으로 살 수 없을 것이다. 인간 정신의 방어기제가 발동하는 것이든 뭐든 어쨌거나 그런 마비증세가 올 수밖에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마비증세가 인간을 버티게 해주는 힘이 되기도 하고, 역으로 그 상황을 바꿀 수 없는 무디고 비인간적인 사람들로 만들기도 하고. 아이러니한 일들이다.

지금은 거의 없다지만 군대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욕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말도 안되게 열악한 인간 이하의 노동조건들, 아까 말한 아이들의 자살 문제나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의 강력범죄들. 이런 것들이 실은 모두 다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자배달 30분제를 하면서 그걸 위해 위험천만한 오토바이 주행을 하다 수많은 청년들이 죽고 다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나를 포함해서 피자를 먹는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별 감각이 없다. 더 심각한 것은 그런 짓을 시키는 사장들이 아르바이트생이라는 타인들의 고통에 감각이 없다는 것이다. 가장 심각한 것은 아르바이트생들 본인이 점점 거기에 길들여져 자신과 동료들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그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책의 내용에서 좀 벗어나는 곳까지 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들이 누군가의 고통에 대한 감각을 잃지 말고 깨어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생각해야겠다. 물론, 나부터. 충분히 배려한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알아채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었음을 알게 되었던 순간들을 기억한다. 완전무결하게 타인을 배려하면서 사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인간적인 인간이 되어야겠다.


* 2013년 4월 30일에 쓴 글입니다.

http://blog.naver.com/kimjh620/20186715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