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라는 책읽기/마음이 머무는 구절

<먼저 온 미래>, 장강명

참참. 2026. 3. 2. 17:27

 

인상주의 시대부터 그런 고민이 시작되었다. 인상주의, 그리고 후기인상주의로도 번역되는 탈인상주의 화가들은 사진이라는 위협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빈센트 반 고흐는 1888년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실제와 똑같이 그리고 색칠하는 게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일이 아니다. 설령 현실을 거울로 비추는 것처럼 색이나 다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일이 가능할지라도, 그렇게 만들어 낸 것은 그림이 아니라 사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사람의 눈으로 본다는 주관적 감각'을 답으로 제출했다. 그들은 사진의 영향을 받는 동시에 당시 사진기가 잘 포착하지 못했던 색채와 움직임을 강조하는 데 힘을 쏟았다. 탈인상주의 화가들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 '예술가 내면의 표현'이라는 답을 찾았다. 대중이 그런 주장에 설득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마네의 그림은 손가락질당했고, 고흐는 가난과 고독에 몸부림쳤다.
그렇게 사실의 재현이라는 가치가 무너지면서 현대추상미술을 향한 길이 열린다. 조금 뒤에 살펴보겠지만 그 길을 걸어가며 미술은 점점 대중이 이해하기 어려운 예술이 됐고,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어쨌거나 300년 전에 활동했던 미술가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와 현대의 미술관을 둘러본다면 전시된 작품을 보고 어리둥절해져서 이게 왜 미술이냐고 물을 것이다. 그사이에 미술의 개념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사진 기술로 인해 미술이 변질됐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AI 기술이 문학을 비롯한 여러 예술의 개념을 바꾸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인간 예술가의 지위를 넘보는 문학 AI, 음악 AI, 미술 AI가 등장했는데도 문학과 음악, 미술의 개념이 지금 이대로 남으리라는 상상이 더 비현실적인 것 아닐까? 어떤 소설이 감동적이며 어떤 음악이 아름다운지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과연 지금 이 상태로 고정돼 있을까?

바둑계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중인 것 같다. AI 시대 이후의 세계 최강자인 신진서 9단은 나와의 인터뷰에서 "인공지능 때문에 바둑이 단조로워졌다고 생각하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독특했다. 그가 보기에는 초반은 바둑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진서 9단은 "바둑의 꽃은 중반"이라며 "중반이 가장 재미있고 치열해요. 초반이 어느 정도 정형화된다 하더라도 중반은 결국 재미있는 바둑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바둑의 매력에 대한 감각이 변하는 중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한국 바둑계가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예술과 스포츠 사이에서 갈팡질팡한 과정을 돌아보며 몇 가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예술과 스포츠라는 개념, 그리고 둘 사이의 경계는 모호하다거나, 어떤 행위의 성격을 정의하는 일은 다음 세대의 가치관을 규정하는 일이 된다거나, 혹은 야구 선수 미키 찰스 맨틀의 말처럼 "당신은 평생 해온 게임에 대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모른다"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통찰은 이것일 듯하다. '인간은 인센티브에 반응한다.' 모건 하우절 『불변의 법칙』에서 썼듯이 인센티브는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욕구를 만들어 낸다". 이것이 불변의 법칙이라는 데 나 역시 동의한다. 불변의 법칙이니까 기사들뿐 아니라 예술가들에게도 적용된다.
하우절은 같은 책에서 "많은 이들이 경제적 인센티브는 뿌리칠 수 있지만 문화적, 집단적 인센티브는 더 뿌리치기 힘들다"라고도 적었다. 예술가들을 움직이는 인센티브에는 경제적 보상도 있지만, 그들은 뭔가 고상한 것, 의미 있는 것, 자신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을 만들어 낸다고 인정받는 것에도 강하게 끌린다. 새로운 기술이 그 인정 욕구를 위협할 때 예술가들은 예술을 재정의해야 한다는 강렬한 충동에 휩싸인다('저런 건 예술이 아니야!'). 그리고 도덕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가 지적했듯이, 인간의 감정은 코끼리이며 이성은 자기가 그 코끼리를 조종하고 있다고 믿는 기수에 불과하다. 코끼리가 방향을 정하고 기수는 그 방향을 합리화한다('저런 건 이러저러한 이유로 예술이 아니야!').

1장에서 소개했던 배명훈 작가와 구병모 작가의 인터뷰 내용을 기억하시는지? 인공지능이 '걸작'을 만들어 낼 때 인간 작가들은 정말로 위대한 작품이 나온다는 사실만을 중요하게 여길까, 인간 작가들은 과연 그 인공지능을 동료로 인정하면서 읽고, 존경하고, 따라가고 싶다고 생각할까. 나는 아닐 거라고 예상한다. 어떤 예술 장르의 정의를 바꾸는 것은 어렵지 않고, 인간은 인센티브에 반응하니까.
절대다수의 사람은 돈을 잃기보다는 벌기를 바라며, 불안해지기보다 안전해지기를 원하고, 미움받기보다 사랑받기를, 무시받기보다 인정받기를 소망한다. 신기술은 그런 개별 욕망의 방향을 뒤집는다기보다는 각각에 기대할 수 있는 인센티브의 크기를 바꾸는데 어떤 인센티브가 압도적으로 커지면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은 드라마틱하게 변한다. 상금으로 1000만 달러를 걸면 절벽 사이에서 외줄타기에 도전할 사람이 생겨난다. 그중에서는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본 나머지 외줄타기가 위험하지 않다고 진지하게 믿는 사람도 꽤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포함해 누군가의 미의식을 조정하는 것 따위는 그에 비하면 훨씬 수월하다. 명품 브랜드들과 패션 디자이너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작업을 하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은 사람을 자극하는 인센티브는 수익성 강화다. 인공지능은 수익성 강화의 도구로 널리 보급될 것이다. 많은 경우 이것은 대중성 강화를 의미한다(이는 몇몇 분야의 스포츠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음악 산업 종사자를 움직이는 것은 경제적 인센티브이며, 그들이 작곡 AI를 이용해 만들어 내는 곡은 듣기 좋고 팔리기 좋은 음악들이지, 난해한 무조 음악들이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출판 산업 종사자를 움직이는 인센티브 역시 마찬가지로 경제적인 것이며, 그들이 문학 AI를 이용해 대량생산할 소설도 전위소설이 아니라 중독성 강한 대중소설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 소설가들은 짜릿하게 재미있는 소설 창작 영역에서 인공지능과 경쟁하는 대신 '훌륭한 소설'의 정의를 바꾸고 반대 방향을 추구하게 되지 않을까? 예술가로서 인정받겠다는 인센티브에 끌린다면 가능한 선택이다. 

172쪽

 

소설 쓰는 인공지능의 도입은 소설가라는 직업에 대한 내 태도를 어떻게 바꿀까? 그것은 소설 쓰는 인공지능이 소설을 쓰는 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지에 달려 있다. 결과물의 질이 뛰어나더라도 내가 주체가 아니라 보조 인력이라고 느낀다면 나는 '내 일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다. 내 글쓰기가 막힐 때마다 인공지능이 기가 막힌 조언을 해준다면 나는 소설 쓰기에서 도전을 할 수 없게 되고, 더 이상 흥분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나온 소설을 '내 것'이라고 여기지도 못할 것이다. 거대한 의미의 흐름에 참여한다고 느끼지도 못할 것이고, 거기에 헌신할 수 있겠다는 믿음도 잃어버린다.
그레이버는 불쉿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절대다수가 비참함을 느낀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모호함과 강요된 시늉" 때문에, "스스로가 원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감내할 만한 가치가 없는 고통"을 받기 때문에, "자신이 해를 끼치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비참하다.
이미 19세기에 도스토옙스키가 그레이버에 앞서 같은 관찰을 한 바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시베리아 유형 체험을 바탕으로 한 중편소설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화자는 유형수에게 완전히 무의미한 일을 시키는 게 가장 참혹한 형벌이라고 말한다. 벽돌을 만들고 땅을 파고 집을 짓는 일은 목적이 있고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을 시키면 죄수는 고되더라도 거기에 열중할 수 있다. 심지어 죄수는 그 일을 잘하고 싶어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감옥의 모든 죄수들은 자연적인 요구와 자기 보존의 감정 때문에 자기의 일과 기능을 가지게 된다"라고, 죄수 중 많은 사람이 "훌륭한 장인이 되어 세상에 나가곤 했다"라고 썼다. 그러나 흙더미를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쌓게 하고 다시 원래 장소로 옮기게 하는 것처럼 쓸모없는 일을 시키면 인간은 그 무의미함과 모욕과 수치를 견디지 못한다. 그는 그 일을 왜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으며, 잘해야겠다는 의지도 잃는다.

나는 AI 시대가 공허의 시대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상상한다. 평범한 인간들이 가치를 잃어버리고, 가치로부터 소외되는. 현대인은 종교로부터 멀어지면서 인간 외부에 객관적 가치가 있다는 믿음에서 멀어졌다. 현대 주류 경제학이 노동가치설을 폐기하면서 우리는 어떤 일에 내재적 가치가 있다는 믿음에서도 멀어졌다. 이제 무신론자와 자유시장주의자가 함께 합의할 수 있는 가치는 시장 가격인데, 그것은 도덕적 규범이나 사회적 가치와는 상관없는 개념이다. 이제 우리는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일을 하면서도 적당한 급여를 받을 때, 그 일에 왜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지 잘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가 새로운 가치의 원천을 찾아내지 못하면 인공지능에 기반한 사회는 거대한 '죽음의 집'이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급여와는 상관없다.
225쪽

직장에서 코딩하는데 매일매일 AI를 쓰고 있고, 이젠(벌써!) AI 없을 때 어떻게 일했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다. 그래서 그런지 AI가 지금처럼 점점 빠르게 발전했을 때 어떻게 될까에 대한 이야기들은 참 재밌다. 물론 이처럼 항상 장밋빛은 아니지만. 장강명 작가님의 이런 통찰을 보면서 한편으론 무섭기도 하고, 사회에 이런 통찰과 논의들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근데 나부터도 경제적 인센티브에 강하게 반응하고 있는 평범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하면 AI를 더 잘 쓸까, 어떻게 하면 AI 기술을 돈 버는 데 이용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더 많이 한다. 50년 후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진짜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