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빌린 옛날판으로 읽었다. 21세기북스 출판사에서 나온 2013년판.
20주년 전면개정판부터해서 1, 2, 3, 4 등 시리즈가 계속 나온 것 같은데 다음에 그것들도 읽어보면 좋을 듯.
내가 읽은 것은 2013년판 1에 해당하는 버전이다.
2. 상호성의 원칙
공짜 샘플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효과적인 마케팅 기술 중 하나다. 공짜 샘플 판촉은 대부분 잠재 고객에게 관련 제품의 일부를 미리 제공해 선호도를 조사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제조사 입장에서는 당연히 대중에게 제품의 강점을 소개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공짜 샘플의 진짜 매력은, 이 역시 일종의 '선물'이다 보니 상호성의 원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공짜 샘플로 판촉을 하는 업자들은 마지 주짓수 고수들처럼 제품 홍보에만 목적이 있는 척하면서 사람들에게 공짜 선물이 주는 자연스러운 부채의식을 심는다.
(중략)
"이제껏 본 가장 환상적인 판매 전략입니다! ····· 벅을 회수하러 가면 고객들이 평균적으로 벅 전체 금액의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제품을 구매합니다. ······ 한마디로, 기가 막힙니다! 우리 조직 전체에서 이런 반응은 정말 처음 봅니다."(매사추세츠 주 총판업자)
각 주의 암웨이 총판업자들은 벅의 놀라운 위력에 당황했다. 유쾌한 당황이긴 했으나 당황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지금 우리는 전혀 당황스럽지 않다.
64쪽
3. 일관성의 원칙
(전략)흉물스러운 '안전운전 하세요!' 입간판을 앞마당에 세우게 해달라고 부탁하게 했다. 어떤 면에서는 이번 집주인들의 반응이 이 연구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이었다. 무려 절반이나 되는 집주인들이 '안전운전 하세요!' 입간판 설치에 동의한 것이다. 그들이 2주 전에 했던 입장 정립의 주제는 안전운전이 아니라 '캘리포니아를 아름답게 지킵시다'라는 전혀 다른 공익적 주제였는데도 말이다.
처음에 프리드먼과 프레이저는 이 연구 결과에 당황했다. '캘리포니아를 아름답게 지킵시다'라는 내용의 청원서에 서명한 행동이 왜 전혀 다른 내용에, 훨씬 더 큰 부탁을 기꺼이 수락하는 원인이 되었을까? 여러 가지 해석을 검토한 결과, 마침내 수수께끼의 해결책에 이르렀다. 청원서에 서명한 행위 자체로 주민들의 자아 이미지가 바뀌었던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시민의식을 발휘해 공공의 일에 적극 참여하는 모범 시민으로 인식했다. 그런데 2주 후, '안전운전 하세요!' 간판을 세우는 또 다른 공익을 위한 일에 참여해달라고 요청받자, 새로 형성된 자신의 자아 이미지와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역시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프리드먼과 프레이저는 이 현상을 이렇게 설명했다.
어떤 일에 참여하거나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에 대한 주민들의 느낌이 달라진 것이다. 일단 하나의 요청을 수락한 뒤 주민들의 태도가 변했다. 그들은 자신을, 이런 종류의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 낯선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는 사람, 자신이 믿는 일을 실천하는 사람, 대의를 위해 협력할 줄 아는 사람으로 여겼다(p. 201).
프리드먼과 프레이저의 발견에서 보여주려는 것은 아무리 사소한 요청도 함부로 승낙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승낙이 우리의 자아 개념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의 승낙은 그와 유사하지만 훨씬 규모가 큰 요구는 물론이고, 실제로 그와 거의 관련이 없는 수많은 다양한 요구에도 승낙할 확률을 높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소한 입장 정립 속에 숨어 있는 이런 식의 2차적이고 일반적인 영향력은 대단히 무서운 점이다.
(중략)
상대방의 자아 이미지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조작할 수 있다면, 상대를 새로운 자아 이미지와 일치하는 온갖 종류의 요구에 자연스럽게 따르도록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입장 정립이 자아 이미지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입장 정립이 이런 효과를 발휘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 있다. 적극적이고, 공개적이며, 수고스럽고, 자발적이어야 한다. 중공군의 의도는 단순히 포로들로부터 정보를 캐내는 것이 아니었다. 미군 포로를 세뇌해 그들 자신, 미국의 정치 체제, 미국이 전쟁에서 맡은 역할, 그리고 공산주의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바꾸는 것이 목적이었다. 한국전쟁 직후 송환 포로 심사를 담당했던 신경심리평가단 단장 헨리 세갈(Henry Segal) 박사는 포로들의 전쟁에 관한 신념이 상당히 많이 변했다고 보고했다. 포로들의 정치적 태도가 심각한 침해를 당했던 것이다.
많은 포로들이 중국 공산당에 반감을 표시했지만, 동시에 중국 공산당이 '중국에서 이룩한 성과'에 대해서는 찬양했다. 일부는 '공산주의는 미국에서는 효과가 없지만, 아시아에서는 괜찮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Segal, 1954, p. 360).
중공군의 진짜 목적은 최소한 당분간만이라도 포로들의 감성과 지성을 바꿔놓는 것이었다. 그들의 성과를 "변절과 배신. 태도와 신념의 변화, 규율, 사기, 활력의 저하, 미국의 역할에 대한 의심"이라는 관점에서 평가하자면, 세갈은 "그들의 시도는 상당히 성공적이었다"고 결론지었다. 중공군의 세뇌 방법을 더 자세히 살펴보자.
마법 같은 행동
상대의 감정과 신념을 파악할 수 있는 진짜 증거는 말보다 행동에서 나온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상대의 행동을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그런데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타인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 알고 싶을 때도 똑같은 증거, 즉 자신의 행동을 이용한다. 자신의 신념과 가치, 태도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원천은 바로 자신의 행동이라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현재 행동이 그의 자아 개념과 장래 행동에 파상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적극적 입장 정립과 소극적 입장 정립이 태도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한 연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 대학생 집단이 지역 중고등학교에서 실시하는 에이즈 교육 프로젝트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연구진은 대학생 절반에게는 스스로 참가신청서를 기입해 적극적으로 자원하게 했고, 나머지 절반은 참가를 원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참가신청서를 작성하지 않도록 한 뒤 억지로 자원하게 했다. 사나흘 후 자원봉사를 시작하라는 요청에 실제로 봉사하러 나온 대부분(74퍼센트)은 적극적으로 참가 신청을 한 학생들이었다. 더욱이 적극적으로 자원한 학생들은 자신의 참가 결정을 개인적인 가치관, 선호, 특성 등과 관련지어 설명하는 성향도 높았다. 다시 말해 적극적인 입장 정립은 우리가 자아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사용할 정보를 제공하고, 그렇게 형성된 자아 이미지는 앞으로의 행동을 결정지으며, 결정된 행동들이 다시 새로운 자아 이미지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이런 방식으로 자아 이미지를 조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했던 중공군은 포로수용소 생활에서 미군 포로들이 중공군에게 바람직한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지속적으로 유도했다. 오래지 않아 중공군은 이런 행동들이 포로들의 자아 이미지 또한 자신의 행동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인식을 바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중공군이 지속적으로 미군 포로들에게 부과한 입장 정립 행동 가운데 하나는 바로 작문이었다. 중공군은 미군 포로들이 중공군의 논리를 조용히 듣거나 말로 시인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항상 강제로 문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셰인(1956)은 중공군의 주요 세뇌 기술 중 하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다음엔 포로에게 질문과 그에 대한 '친공산주의적인' 답변을 문서로 작성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포로가 자발적으로 답변을 적지 않으면 다른 공책을 보고 답변을 베껴 쓰라고 요구했는데, 포로는 그 정도는 별로 해로울 것 없는 양보라 생각하고 따랐음에 틀림없다(p. 161).
'해로울 것 없는' 양보라니! 겉보기엔 사소해 보이는 입장 정립이 어떻게 그와 일관된 행동들을 이끌어내는지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다. 입장 정립의 도구로 문서 작성은 장점이 매우 크다. 첫째, 자신의 행동에 대한 물리적 증거가 된다. 일단 중공군이 원하는 대로 문서를 작성하면, 미군 포로는 자신의 행동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순전히 말만 했을 때와 달리 글이라는 증거를 남긴다면 자신의 행동을 잊어버리거나 부인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자신의 행동이 돌이킬 수 없는 문서로 남았으므로 미군 포로는 자신의 신념과 자아 이미지를 자신이 이미 저지른 부정할 수 없는 행동과 일치시키게 된다. 둘째, 작성된 문서를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할 수 있다. 당연히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데도 사용될 수 있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들의 태도를 문서에서 제시한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다. 무엇보다 문서를 작성한 사람이 자신의 신념을 솔직하게 글에 담았다는 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가 있다.
사람들은 누군가 작성한 문서에는 그 사람의 진실한 태도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Gawronski, 2003). 놀라운 점은 그 문서를 자의로 작성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계속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과학적 증거는 심리학자 에드워드 존스와 제임스 해리스의 연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1967). 연구진은 피험자들에게 피델 카스트로에 대해 호감을 표현한 에세이를 한 편 보여주고 저자의 진실한 감정을 추측해보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일부 피험자들에게 친카스트로적인 에세이를 저자가 자의로 썼다고 이야기한 반면, 다른 피험자들에게는 저자가 타의로 어쩔 수 없이 썼다고 이야기했다. 의아한 점은 저자가 타의로 친카스트로적인 에세이를 썼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피험자들조차 저자가 카스트로를 좋아한다고 추측했다는 사실이다. 신념을 담은 글은 그 글을 읽는 사람들한테서 '누르면, 작동하는' 자동반응을 일으키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한, 그 글을 읽은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글에 저자의 진심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친중국적 또는 반미국적 문서 작성이 미군 포로의 자아 이미지에 미 쳤을 이중 효과를 짐작해보자. 문서를 작성한 포로에게는 자신의 행동을 영원히 기억하게 하고, 중공군이 포로의 동료들을 설득할 때는 포로가 진짜 변절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증거물이 되었을 것이다. 'PART 4'에서 살펴보겠지만 주변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진실로 믿을지 결정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관대한 사람으로 소문이 자자하다는 칭찬을 들은 코네티컷 주 뉴헤이븐의 주부들은 일주일 후 다발성경화증협회 모금원들이 방문하자 다른 지역 주부들보다 더 많이 기부했다는 연구도 있다. 누군가 자신을 관대한 사람으로 평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에 겉맞은 행동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영리한 정치가들은 오래전부터 이런 식으로 상대에게 뭔가 '꼬리표' 를 남겨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는 방법을 사용해왔다.
(중략)
협상의 대가인 헨리 키신저는, 사다트가 협상의 달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협상 상대에게 유지해야 할 평판을 부여함으로써 자신에게 유리한 행동을 이끌어낸 덕분이라고 말한다.
일단 입장 정립을 하고 나면 자아 이미지는 양쪽으로부터 일관성의 압박을 받게 된다. 내적으로는 자신의 자아 이미지에 걸맞은 행동을 하라는 압박이, 외적으로는 자신의 자아 이미지를 다른 사람들의 인식에 맞춰 조정하라는 은밀한 압박이 가해진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작성한 문서에 진심이 담겨 있다고 믿는다면(비록 자의로 작성하지 않았다 해도), 우리는 다시 한 번 자아 이미지가 문서 내용과 일치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게 된다.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은 몇 가지 방법을 이용해 직접적인 강제 없이도 미군 포로들에게 중국에 유리한 내용을 문서로 작성하게 했다. 중공군은 많은 전쟁포로들이 자신의 생존 소식을 가족에게 전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반면에 포로들은 중공군이 모든 편지를 검열하고 나서 극소수의 편지만 수용소 밖으로 내보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일부 포로들은 검열을 통과하려고 일부러 편지에 평화를 호소하거나, 중공군의 호의적인 대우를 공개하거나, 공산주의에 대한 공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리한 내용을 담은 편지를 세상에 공개하려는 중공군이 편지 발송을 허가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물론 그 편지들은 중국 측에 대단히 유익했기에 중공군은 기까이 협력했다.
(중략)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수용소에서 정치 백일장도 자주 실시했다. 상품은 담배 및 개비, 과일 및 개로 보잘것없었지만, 수용소에서는 워낙 귀한 물건이라 포로들의 관심이 무척 높았다. 보통은 친중국적 태도를 확실하게 표현한 글이 수상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공산당 찬양문을 씨야만 상을 받는다면, 대부분의 포로들이 백일장에 참가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중공군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포로들의 마음속에 공산주의에 호의적인 입장 정립이라는 작은 씨앗을 뿌려두면, 씨앗이 점점 자라 꽃을 피우리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대체로 미국을 지지하면서도 한두 번가량 중국의 시각에 찬성하는 글에 상을 주었다.
이 전략은 정확히 중국이 원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중략)
경이적인 성공을 이룬 암웨이 사에는 영업사원들에게 최고의 실적을 끌어내는 방법이 있다. 바로 개인별 판매 목표를 세우고 이를 문서로 작성하도록 하는 것이다.
영업 시작 전에 마지막 팁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목표를 정해 종이에 적어두십시오. 목표가 무엇이든, 중요한 것은 당신이 목표를 세웠다는 것이고, 달려갈 곳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목표를 종이에 적어두십시오. 뭔가를 적어두면 마력이 발휘됩니다.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또 다른 목표를 세워 다시 적어두십시오. 거기서 시작해 앞으로 달려나가면 됩니다.
암웨이 사가 '뭔가를 적어두면 마력이 발휘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면, 다른 영업조직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중략)
청약철회법이 발효되자 이런 고객들이 무더기로 거래를 취소하기 시작했다.
방문판매 회사들은 거래 취소율을 줄일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방법을 찾아냈다. 계약서 작성을 영업사원이 아니라 고객에게 맡기는 방법이었다. 한 유명 백과사전 회사의 영업훈련 프로그램에 따르면, 고객에게 직접 서류를 작성하도록 하면 '나중에 계약을 취소하지 못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심리적 방어막'이 된다고 한다.
다른 사람 앞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면, 일관성 있는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그 입장을 고수하려는 욕망이 생긴다. 일관성 있는 것이 사회에서 얼마나 바람직한 특징인지 앞서 설명한 바 있다. 일관성 없는 사람은 변덕스럽고, 불확실하고. 귀가 얇고, 경솔한 사람으로 매도되는 반면 일관성 있는 사람은 이성적이고, 확실하고, 신뢰할 만하고, 건전한 사람으로 평가 받는다. 그러므로 누구나 자신이 일관성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행위를 꺼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자신의 입장을 공개할수록 체면상 그 입장을 더욱 고수하려 들 것이다.
공개적 입장 표명이 앞으로의 일관성 있는 행동으로 연결되는 사례는 두 명의 저명한 사회심리학자 모튼 도이치와 헤럴드 제라드가 시행한 실험에서 찾아볼 수 있다(1955). 연구진은 먼저 대학생들에게 여러 개의 선을 보여주고 마음속으로 길이를 짐작하게 했다. 이때 첫 번째 집단의 학생들에게는 짐작한 수치를 종이에 적고 서명해 실험자에게 제출하는 것으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공개하도록 했다. 두 번째 집단의 학생들에게는 짐작한 수치를 금방 썼다가 지울 수 있는 매직 패드에 몰래 적었다가 누가 보기 전에 얼른 지움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자신한테만 분명히 하도록 했다. 세 번째 집단의 학생들에게는 아예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할 필요 없이 짐작한 수치를 머릿속으로만 기억하도록 했다.
도이지와 제라드는 이런 식으로 일부 학생에게는 공개적으로, 또 다른 일부 학생에게는 개인적으로 입장을 표명하게 하고, 나머지 학생들에게는 입장 표명이 필요 없는 상황을 마련했다. 도이치와 제라드의 목적은 세 집단의 학생들 가운데 기존 판단이 틀렸음을 보여주는 새로운 정보를 제공했을 때 자신의 첫 판단을 가장 강하게 고수하는 집단이 어느 쪽인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모든 학생에게 첫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시사하는 새로운 증거를 제공한 후 판단을 번복한 기회를 부여했다.
실험 결과는 매우 분명했다. 기존 선택을 가장 쉽게 포기한 집단은 자신의 판단 내용을 적지 않은 집단이었다. 이들은 머릿속에 담고 있던 자신의 첫 판단에 의문을 제기하는 새로운 증거를 제시하자, 금방 새로운 정보의 영향을 받아 자신이 앞서 '옳다'고 생각했던 결정을 쉽게 번복했다. 입장 정립을 하지 않았던 이 집단에 비해, 자신의 판단을 매직 패드에 잠깐 동안 기록했다가 지운 집단은 판단을 번복할 기회를 줘도 의견을 바꾸는 데 다소 머뭇거렸다. 비록 자신한테만 했던 입장 정립이었지만, 일단 첫 판단을 글로 적었으므로 기존 결정과 모순되는 새로운 증거의 영향을 거부하고 기존 결정을 고수하려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의견 번복을 가장 강하게 거부한 집단은 바로 자신의 첫 판단을 공개적으로 보고한 집단이었다. 이 집단을 가장 완고한 집단으로 이끈 것은 바로 공개적인 입장 표명이었다.
일관성보다는 정확성이 생명인 상황에서도 이런 완고함이 나타날 수 있다. 6~12명의 모의 배심원에게 판단이 까다로운 사건의 평결을 맡 긴 어느 실험에서, 배심원들이 비밀투표가 아니라 손을 들어 공개적으로 의견을 표시해야 하는 경우에 '평결불능(배심원의 의견이 엇갈려 평결을 내리지 못하는 것-옮긴이)' 판정이 더 자주 나타났다.
(중략)
자신이 공개적으로 밝힌 의견을 가장 완강히 고수한다는 도이치와 제라드의 발견을 유용하게 이용할 수도 있다. 나쁜 습관을 버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단체 등을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비만 클리닉에서는 사람들이 체중 감량 결심을 한 경우 군침 도는 제과점 진열장이나 코끝을 간질이는 음식 냄새, 늦은 밤 야식 광고 등에 아주 쉽게 넘어간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다. 따라서 반드시 공개 선언이라는 튼튼한 기둥을 세워준다. 체중 감량 목표를 종이에 적어 친구, 친척, 이웃 등 되도록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보여주라고' 유도한다. 모든 방법에서 실패한 사람도 이 간단한 방법으로 효과를 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중략)
수고의 효과
입장 정립에 더 많이 노력할수록 태도 또한 확연히 달라진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 증거는 우리 주변은 물론이고 저 멀리 원시부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우리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신문의 공연 정보란부터 살펴보자. 대중음악 콘서트 광고가 실렸는데 가장 중요한 티켓 가격 정보가
138쪽
("가격 정보가" 뒤는 140페이지에서 이어지는데 책을 반납해서 옮겨적지 못했다. 가격을 알아내기 위해 전화해보는 등 노력을 기울이면 이미 들인 노력이 아까워져서 그 공연을 보는 걸 더 적극적으로 고려하게 된다는 이야기.)
젊은 연구자 엘리엇 에런슨과 저드슨 밀스는 "엄청난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내고 뭔가를 얻은 사람은 최소한의 노력으로 같은 것을 획득한 사람보다 그것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는 가정을 입증하기로 했다. 이 무슨 고마운 우연의 일치인지, 두 연구자가 가설을 시험한 대상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사교클럽의 입회의식이었다. 실험 결과 섹스 관련 토론클럽에 가입하려고 극도로 수치스러운 입회의식을 견뎠던 여대생은 자신이 가입한 클럽과 토론 내용이 매우 가치 있다고 확신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에런슨과 밀스의 지시를 받은 클럽회원들이 최대한 '가치도 없고 재미도 없는' 토론을 준비했는데도 말이다. 반면에 훨씬 수월한 입회의식을 거쳤거나 아예 입회의식을 치르지 않은 여학생들은 자신이 가입한 '가치 없는 클럽'에 대해 확실히 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여학생들이 특정 클럽에 가입하기 위해 수치가 아니라 고통을 견딘 경우에도 같은 결과가 나타났다. 입회의식의 일부로 전기 충격을 더 강하게 받은 여학생일수록 나중에 자신이 선택한 클럽과 그 활동이 더 재미있고, 지적이고, 바람직하다고 확신했다.
드디어 입회의식에 가득한 학대와 노역, 매질이 이해가 된다. 열 살 난 아들이 '신비의 광야' 한복판의 차가운 땅바닥에서 벌벌 떨며 밤을 보내는 모습을 눈물 어린 눈으로 지켜보는 통가족 아버지나, '지옥의 밤'에 사교클럽의 신입 '후배들'을 두들기 패다가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뜨리는 대학 선배 모두 결코 사디스트들은 아니다. 그들은 집단의 생존 전략에 따랐을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역할은 다음 세대의 집단 구성원들이 자기 집단을 좀 더 매력적이고 가치 있게 생각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인간에게, 노력해서 얻은 것을 더 좋아하고 더 신뢰하는 경향이 있는 한, 이 집단들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입회의식을 지속할 것이다. 이에 따라 신입회원들의 충성과 헌신으로 집단의 단결과 생존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실제로 54개의 부족 문화를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가장 극적이고 가혹한 입회의식을 치르는 부족들이 내부 결속력이 가장 강했다. 입회의식이 가혹할수록 클럽에 대한 신입회원의 헌신이 월등히 높아진다는 에런슨과 밀스의 연구 결과를 보면, 클럽들이 모임의 미래와 결정적인 관련이 있는 입회의식을 절대 폐지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입회의식' 하면 군대 조직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신병훈련소의 혹독한 신고식은 효과적인 것으로 악명이 높다. 소설가 윌리엄 스타이런은 마치 집단수용소 같은 미국 해병대의 '악몽 같은 훈련' 과정을 공개한 후 그 효과를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내가 아는 해병들은 하나같이 그 혹독한 훈련 과정이 자신을 더욱 용감하고 씩씩한 불굴의 해병으로 만들어줬다고 생각한다.
146쪽
호된 신고식을 치른 예비회원에게 그것이 자선활동이었다고 생각할 여지를 주어선 안 된다. 작문에 반미적인 내용을 덧붙인 미군 포로도 그것이 대단한 상품을 받기 위한 위장술이었다고 둘러댈 수 없어야 한다. 사교클럽과 중공군 모두 '장기적인' 목표가 있다. 억지로 상대의 입장 정립과 헌신을 짜낸다고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내적 책임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중공군이 미군 포로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는 방법으로 정치 백일장을 선호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중국 정부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자들을 무차별 학살한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글짓기 대회가 봇물을 이뤘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베이징만 해도 국영 신문사와 방송국들이 '반혁명 반란의 진압'에 관한 글짓기 대회를 후원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공개적인 입장 표명에 대해 보잘것없이 보상하는 중국 정부의 통찰력 넘치는 전통에 따라 입상 상품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었다.
사회과학자들은, "우리는 강력한 외부 압력 없이 스스로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행동에 대해서만 내적 책임을 느낀다"고 주장한다. 큰 보상 역시 그런 외부 압력 중 하나다. 큰 보상에 따라 특정한 행동을 할 수는 있지만 그 행동에 대해 내적 책임을 느끼지는 못한다. 결과적으로 적극적인 입장 정립은 불가능하다. 강력한 위협도 마찬가지 작용을 한다. 즉각적인 복종은 이끌어낼 수 있겠지만, 장기적인 현신은 유도하기 어렵다.
150쪽
우리가 일단 어떤 선택을 하면 그 선택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이유를 만들어낸다는 점을 악용해, 그들은 그럴듯한 유인 요소를 제공해 선택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우리가 결정을 내리면 그들은 그 유인 요소를 제거해버린다. 우리가 새로 만들어낸 이유와 근거를 바탕으로 기존 결정을 유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
영업사원들은 먼저 고객이 관심을 보이는 차에 대해 경쟁사보다 거의 400달러 정도 낮은 가격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 할인 가격은 거짓이다. 영업사원은 그 가격으로 계약을 맺을 생각이 없다. 그의 목적은 잠재고객이 자동차를 자신의 대리점에서 구매하기로 '결정'하게 하려는 것이다. 일단 잠재 고객이 결정을 내리면, 고객을 더욱 깊이 끌어들이기 위해 계약 관련 서류를 한 뭉치 작성하게 하거나. 금융 관련 조건들을 결정하게 하거나, 계약서에 서명을 하기 전에 하루 정도 시운전을 해보면서 '자동차를 직접 느껴보고 이웃이나 직장 동료에게도 보여주라고' 권한다. 이런 행위를 하는 동안 고객은 자신의 선택을 지지하고 자신의 투자를 정당화할 새로운 이유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 대개는 견적서에서 '실수'가 발견된다. 예를 들어 영업사원이 깜빡하고 에어컨 비용을 추가하지 않아 고객이 에어컨 설치를 원한다면 원래 견적에 400달러를 추가 부담해야 한다는 식이다. 고의라는 의심을 피하려고 일부 영업사원들은 금융 관련 서류를 처리하는 은행 측에서 자신의 '실수'를 발견하도록 한다. 또는 마지막 단계에서 상사의 결재가 떨어지지 않도록 한다. 거래 조건을 검토하던 상사가 '대리점에 손해가 된다'는 이유로 거래를 취소하는 것이다. 수만 달러 짜리 거래를 하는 고객 입장에서 400달러 정도 추가하는 것이 무슨 대수겠는가? 영업사원이 계속 강조하듯이 400달러를 추가해봐야 어차피 경쟁사와 같은 가격인 데다, '당신이 원하는 차가 바로 이 차가 아닌가'.
훨씬 교활한 형태의 '낮은 공' 전략은 영업사원이 고객의 중고차 매입가를 시세보다 높게 책정해 신차 판매와 중고차 매입을 한데 묶는 방법이다. 고객은 영업사원이 제시한 높은 중고차 매입가에 마음이 끌려 얼른 거래를 승낙한다. 그러나 계약서에 서명하기 직전, 중고차 담당자가 달려와 영업사원이 제시한 중고차 매입가가 400달러 높게 책정되어 원래 시세 수준으로 매입가를 낮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객은 중고차 매입가를 시세 수준으로 낮추는 것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낮은 매입가를 수용할뿐더러 종종 자신이 '순진한' 영업사원의 호의를 이용해 이득을 취하려 했다는 죄책감까지 느낀다. 한번은 자신에게 이런 식의 '낮은 공' 전략을 사용한 영업사원에게 몹시 난처한 얼굴로 연신 사과를 하는 여성 고객을 목격한 적도 있다. 여성 고객은 신차 매입계약에 서명했을 뿐 아니라 영업사원에게 거액의 수수료까지 챙겨주었다. 영업사원은 상처받은 듯한, 하지만 수수료 덕분에 기분이 약간 풀렸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어떤 '낮은 공' 전략이든 기본적인 전개 과정은 같다. 먼저 고객의 긍정적인 구매 결정을 유도할 만한 유리한 조건을 제시한다. 하지만 고객이 결정을 내리고 계약서에 서명하기 직전, 처음 제시한 유리한 조건을 슬그머니 철회한다. 그러면 도무지 고객이 거래를 수락할 것 같지 않은 불리한 조건만 남는다. 그런데도 효과가 있다.
156쪽
일관성의 원칙에 대응하는 자기방어 전략
입장 정립과 일관성 원칙이 결합된 설득의 무기를 방어하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일관성 원칙에 따르는 것이 대체로 유용하고 때로 필요하지만, 경우에 따라 어리석고 경직된 측면도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기계적인 입장 정립과 일관성 반응을 악용하려는 사람들의 먹잇감이 될 수 있으므로 우리는 자동적이고 무분별하게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성향을 반드시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자동적 일관성은 대체로 경제적이고 적절한 반응을 가능하게 하는 유용한 측면도 있어 우리 삶에서 완전히 제거해버릴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끔한 결과가 벌어질 것이다. 만약 이전의 결정이나 행동을 자동적으로 반복하지 않고 일일이 모든 것을 심사숙고해서 행동해야 한다면 중요한 일을 수행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할 것이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는 위험하고 기계적인 일관성이 '필요'하기도 하다. 이런 일관성의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일관성이 어리석은 선택을 유도하는 순간을 알아차리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 몸에는 그런 순간을 미리 경고해주는 두 가지 신호가 있다.
163쪽
4. 사회적 증거의 원칙
신문 1번에 자살 보도가 난 이후 발생한 교통사고의 경우 평소보다 사망률이 네 배나 높았다(Phillips, 1980).
필립스의 통찰에서 또 다른 놀라운 예측이 가능하다. 자살 보도 이후 교통사고가 증가하는 현상이 정말 일종의 모방 자살이라면 모방자들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의 자살을 모방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 사회적 증거의 원칙에 따르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행동 방식을 참고로 자신에게 적합한 행동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대학 캠퍼스 기금모금 실험에서 보여주듯이 우리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의 행동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이 현상의 배후에 사회적 증거의 원칙이 작동한다면, 대대적으로 보도된 자살 사건의 주인공과 보도에 뒤이어 교통사고를 일으킨 사람들 사이에 확실한 유사성이 있어야 한다고 필립스는 추론했다. 또한 이를 분명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운전자 한 명이 차 한 대로 일으킨 교통사고 기록을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필립스는 자살 보도 주인공의 연령대와 자살 보도 직후 혼자 어딘가에 충돌해 사망한 운전자들의 연령대를 비교해보았다. 예측은 다시 한 번 놀라울 정도로 적중했다.
자살 보도의 주인공이 젊은 사람이었을 때에는 혼자 자동차로 나무나 기둥, 제방 등에 돌진해 사망한 사람 대부분이 젊은 운전자였다. 그러나 자살 보도의 주인공이 나이 든 사람일 경우에는 그런 사고로 사망한 사람은 대부분 나이 든 운전자였다(Philips, 1980).
이 마지막 통계로 나는 결정적인 확신을 얻었지만, 한편으론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사회적 증거의 원칙이 얼마나 광범위하고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지, 삶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결정까지도 좌지우지했다. 필립스의 연구를 보면, 안타깝게도 자살 보도는 자살자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자살 동기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슷한 사람의 자살을 통해 자신의 자살을 합리화하는 것이다. 더 끔찍한 일은 그들이 자살하려고 일으킨 사고에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함께 희생된다는 점이다.
오싹한 자살 관련 통계자료만으로 만족하지 못한 듯, 필립스는 더 놀라운 추가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Philips, 1983). 폭력 행위가 대대적으로 보도된 이후에는 모방, 즉 카피캣 폭력에 따른 살인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전국 네트워크 뉴스로 헤비급 타이틀 매치가 보도된 저녁에는 미국 전역의 살인 사건 발생률이 상당히 높아진다. 1973년부터 1978년 사이의 헤비급 타이틀 매치와 그에 따른 모방 폭력의 관계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매우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타이틀 매치에서 흑인 선수가 패하면 이후 열흘 동안 젊은 흑인 남성을 대상으로 한 살인 사건이 급증한다. 반면에 백인 선수가 패하면 이후 열흘 동안 주로 백인 남성이 살해된다. 이런 결과를 필립스의 자살 연구 자료와 결합해보면 폭력적 행동이 대대적으로 보도된 경우, 사람들이 자신한테든 타인한테든 유사한 폭력을 행사할 확률 또한 높아진다는 결론이 나온다.
사회적 증거의 원칙의 부정적인 측면이 가장 극적으로 표출되는 분야가 바로 카피캣 범죄일 것이다. 1970년대에는 비행기 납치 사건이 마치 바이러스처럼 번졌고, 1980년대에는 타이레놀 캡슐에 청산가리를 주입하거나 거버 유아식에 유리 조각을 넣는 등 제품에 이물질을 투입하는 사건이 자주 발생했다. FBI 과학수사대에 따르면 이런 종류의 사건들이 전국적으로 보도되고 나면 평균 30건 정도의 유사 사건이 추가 발생했다. 최근 들어 직장이나 학교 등에서 대량 학살 사건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전국을 충격에 몰아넣었다. 한 예로 1999년 4월 20일 콜로라도 주 리틀턴 콜롬바인 고등학교 학생 두 명이 저지른 유혈 참극 직후, 경찰에 비슷한 계획이나 시도가 수십 건씩 접수되었다. 그중 두 건이 '성공'을 거두었다.
222쪽
6. 권위의 원칙
의사라고 신분을 밝힌 다음, 특정 병동의 한 환자에게 에스트로겐 20밀리리터를 투약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투약 지시에는 간호사들이 의심할 만한 요인이 네 가지나 있었다. 첫째, 전화로 처방을 내리는 것은 병원 규정 위반이었다. 둘째, 공인받지 않은 약물이었다. 에스트로겐은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아 아직 병동에 배치하지 않은 상태였다. 셋째, 처방 용량이 분명 위험 수위를 넘어 있었다. 약품 포장에는 '하루 최대 투약 용량'이 처방 용량의 절반인 10밀리그램으로 적혀 있었다. 넷째, 처방을 내린 의사는 간호사가 알지도, 만나지도, 심지어 전화 통화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95퍼센트에 달하는 간호사들이 곧장 병동 약제실로 가서 처방받은 분량의 에스트로겐을 챙겨 환자에게 투약하려고 병실로 향했다. 바로 이 순간, 은밀히 지켜보던 연구진이 뛰어나와 간호사에게 실험 내용을 설명하고 투약을 중단시켰다.
실험 결과는 공포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95퍼센트나 되는 간호사들이 누가 봐도 부적절한 지시를 명목적으로 따랐다면, 나 역시 언젠가 병원을 이용할 고객으로서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중서부 지역 의료진의 연구 결과를 보면 병원의 실수는 환자의 항문에 귀 염증 치료약을 투약하는 등과 같은 비교적 경미한 과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훨씬 심각하고 위험한 실책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염려스러운 실험 결과를 분석하면서 연구진은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결론을 내렸다.
실험과 유사한 실제 상황이 벌어진다면, 이론상으로는 의사와 간호사라는 두 명의 지적인 전문가는 환자에게 유익한 조치가 이루어지도록, 아니면 적어도 환자에게 해로운 조치가 취해지지 않도록 서로 협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실험 결과를 보면 지적인 전문가 두 명 가운데 한 명이 전혀 실질적인 기능을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간호사는 의사의 지시가 떨어지는 순간 '지적인 전문가'의 자격을 포기하고 '누르면, 작동하는' 반응으로 이동해버렸다. 자신의 할 일을 결정하는 데 자신이 가진 상당한 의학 지식과 경험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자동 복종 과정을 거쳐 실수를 저질렀다. 자신의 업무 환경에서는 합법적인 권위자에게 복종하는 것이 항상 가장 효과적이고 바람직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복종 성향이 너무 지나치다 보니 진짜 권위자도 아니고 가장 쉽게 권위자를 사칭할 수 있는 상징, 의사라는 직함 하나만으로도 자동반응을 보이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3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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