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0~2022

타임 투 런

참참. 2022. 11. 26. 14:08

 

"민티런 MintyRun"이라는 유튜브 채널이 있다. 달리기 영상을 자주 보다보니 유튜브에 다양한 달리기 관련 채널의 영상들이 뜬다. 그렇게 몇 개의 영상을 보며 알게 된 채널이다. 어제도 우연히 영상을 보다가 오늘 타임투런이라는 비대면 마라톤대회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타임투런은 민티런 채널의 유튜브 라이브 방송과 함께 같은 시간동안 달리는 대회다. 다른 마라톤 대회들이 보통 거리를 기준으로 달리지만 타임투런은 서로 다른 곳에서 서로 다른 속도로, 다만 다 같이 한 시간동안 달리는 것이다.

참신하고 재밌겠다 싶었다. 게다가 민티런 유튜버님이 내가 예전 영상에다 질문 댓글을 달았는데 거기에 세심한 답변까지 달아주셔서 더더욱 호감이 갔다. 평상시에 걸리적거리는 것도 싫고 음악에 따라 페이스가 영향을 받는 것도 귀찮고 해서 아무 음악도 듣지 않고 뛴다. 이어폰 자체를 끼지 않고, 그냥 내 숨소리와 발소리만 듣고 뛰는 것이 익숙하다. 새로운 경험도 좋겠다 싶어서 한번 참여해봤다. 어차피 오늘은 한시간쯤 달리려고 했으니까.

실수한 것은 요즘 러닝할 때 신던 써코니 대신 올버즈 트리대셔를 신고 나갔다는 것이다. 신발이 너무 빨리 닳는 게 아까워서 오늘은 가볍게 뛸 작정으로 최근엔 산책용으로만 신던 예전 러닝화를 신은 것인데, 일곱 번째 타임투런인 오늘 타임투런의 주제는 Transcendence, 초월이었다. 평소에 즐겁게 달리는 걸 강조하던 분인데 오늘은 평상시와 다소 다른 기획이었던 것! 신발 좀 다르다고 기록을 못 낼 건 없다싶어서 오늘의 컨셉에 맞게 열심히 한번 해보자고 힘을 냈다.

8시 40분에 방송이 시작되었고 20분은 워밍업 시간이었다. 나도 안양천에 8시 40분 즈음에 도착해서 몸을 풀기 시작했다. 보통 달리기 전에 간단한 스트레칭하고 집에서 안양천까지 걷거나 살짝 뛰는 정도만 하고 안양천에 도착하면 바로 달리기 시작했는데, 20분동안 1km 이상의 천천히 달리기를 포함한 이런 본격적인 워밍업은 처음 해봤다. 확실히 워밍업을 많이 하니까 처음부터 좀 더 빠른 페이스로 달릴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는 출발할 때부터 10분 간격으로 멘트를 해주시고 그 사이엔 음악을 틀어주셨는데 10분 단위 멘트 말고도 음악 사이사이에 추가 멘트도 있어서 음악 한 곡 듣고 멘트 듣고 하다보니 시간이 금방 갔다. 특히 중반에 멘트를 "달리세요!"라고 마무리하면서 음악이 촥 깔릴 때는 마침 해가 비치는 풍경과 어우러져 마치 영화 속을 달리는 것같은 기분도 잠깐 들었다. 시간이 금방 가는 것과는 별개로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멘트 때마다 몸 상태에 따라 페이스를 조금씩 올리라고 끊임없이 주문하셨기 때문에 몸은 상당히 힘들었다. 중반부에 올려놓은 페이스를 후반부에 접어들 때는 약간 늦출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에는 다시 조금 더 끌어올렸지만, 거의 한계에 다다랐었다.

드디어 한 시간이 다 되고, 마지막 20초 질주하세요라는 멘트와 함께 이미 지칠대로 지친 몸의 마지막 에너지를 끌어내어 그 상태에서 낼 수 있는 최고 속도를 끌어내며 마무리했다. 헉헉대며 터덜터덜 집 방향으로 걷는데, 이렇게 힘들게 뛰었음에도 10키로미터 최고기록을 경신한 것도 아니고 재밌었지만 아쉬움도 있고 다 떠나서 너무 힘들고 그랬다. 그런데 그때 들려오는 민티런님의 마무리 멘트가 나를 울렸다. 그때부터 울면서 집에 갔다. 그리고 그로 인해 오늘의 달리기 경험에는 더 많은 의미가 부여되었고 그 멘트를 듣기 전과는 다른 이미지로 기억 속에 더 강렬하게 남게 되었다.

나를 울게 한 이야기는 오늘의 주제인 한계 초월의 "한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한계는 숫자가 아닙니다. 오늘의 달리기가 물리적으로는 여러분의 최고기록이 아닐 수 있지만 뛰는 내내 그만 달리고 싶다는 마음과 오늘 지금 이 순간의 자기 자신의 한계를 넘어섰다면 한계를 초월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르고 달리기에는 너무나 많은 변수가 있기에 기록이 전부는 아닙니다. 지금의 달리기에서는 지금 이 순간의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면 됩니다. 우리는 모두 다르기에 모두 승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남은 모든 힘까지 질주로 폭발시키고 나를 한계까지 몰아붙인 직후의 순간에 그런 말을 들으니 울컥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나름의 최선을 다해도 도달할 수 없었던 목표들, 거기에 도달하지 못했으니 실패했다 여기거나 나 자신을 다그치고 깎아내리던 스스로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당시의 내 한계에 최선을 다해 부딪치고 넘어서고도 왜 더 잘하지 못하냐며 다그치는 목소리에 좌절하고 무너졌던 과거의 나까지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선곡은 "Be Bold, Be Brave"(더 대담하게, 더 용감하게).

<순간의 힘>이라는 책에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의식하지 않고 사는 사실을 강조한다. 바로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시간은 절대 똑같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은 10초, 10분이라도 우리가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들과 다르게 어떤 순간들은 영원히 기억에 남아 평생동안 우리를 지탱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특별한 순간이다. 저자들은 그 특별한 순간을 충분히 의도적으로 만들 수 있다며 미국에서 아주 특별한 졸업식을 기획했다. 학생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자신의 성취를 모두에게 인정받고 축하받으며 지나온 시간들을 긍정받는 이벤트를 디자인한 것이다.

눈물과 함께 걸으며 그 이야기를 떠올렸다. 최근 두 달간 거의 매일같이 하루 평균 5km 이상을 달렸다. 물론 그 모든 달리기들이 다 좋은 경험이었고, 기록으로 남아있고, 내게 힘이 되고 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수십, 수백 번의 달리기의 순간들이 다 세세하게 기억에 남지는 않는다. 단순히 한 시간동안 달린다라는 경험을 타임투런은 완전히 다른 경험으로 만들어냈다. 이런 경험을 디자인하고 실현해냈다는 게 놀랍다. 심지어 어떤 오프라인 행사나 함께 모임으로써 주고받게 되는 에너지도 없이 온라인 라이브 방송을 통해 이런 달리기 경험을 줄 수 있다는 것이 감탄스럽다. 정말 멋진 순간을 선물 받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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