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0~2022

꿈과 트라우마

참참. 2022. 11. 8. 13:25

꿈을 잘 기억 못하는 편인데, 오늘 아침엔 꿈 속에서 느낀 감정이 강렬해서인지 깨고나서도 그 감정에 휩싸여있는 걸 느꼈다. 강렬한 감정은 기억에 잘 남는다. 꿈에서 이번 일본여행을 같이 갔던 연인과 연인의 언니커플이 나왔다. 넷이서 걷다가 가게에 들러 음료와 빵같은 걸 샀는데, 나는 왜인지 가게에서 나오자마자 내 빵을 연인에게 줬다. 그러자 연인이 바로 빵 하나를 언니의 애인에게 줬다. 언니의 애인인 그 형님은 다시 나에게 빵을 줬다. 얼떨떨하고 서운했다. 형님에게 받은 빵을 들고 천천히 걸었더니 셋이 앞에서 점점 멀어졌다. 그러다 연인이 혼자 속도를 늦추는 게 보였다. 그래도 나를 기다려주는구나 하고 기분이 다시 좋아지려고하던 찰나,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연인이 왜 이렇게 혼자 처지냐며 쏘아붙이고는 계속 그렇게 처지면 그냥 두고 가겠다고 말했다. 말문이 막히고 화가 나서 잠에서 깼다. 깨어서 꿈인 걸 알았는데도 화라는 감정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그걸 바라봤다.

실제 연인과 만나는 동안 그런 비슷한 행동을 하는 걸 본 기억은 없다. 어쩌다 이런 꿈을 꿨을까. 지금까지 연인과의 여행은 늘 단둘이서 가는 국내 여행이었는데, 이번에는 다른 두 사람과 함께 해외로 나갔다. 다른 상황과 다른 관계 속에 놓이니 다른 트라우마들이 건드려진다. 거절은 예전의 다른 거절당했던 상황들,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 그때의 상태로 나를 데리고 간다. 친구들과 놀러가는 전 와이프를 몇번은 따라다녔지만 나중에는 혼자 다녀오라 하고 집에 있었다. 놀러다닐 교통비조차 부담스러웠고 경제적인 무능력보다 더한 무기력 상태에 있었다. 난 그냥 집에 있는게 더 편해서 집에 있겠다고 한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친구 만나러 갈 돈도 에너지도 없고 나중에는 만나거나 연락할 친구도 없다는 자괴감은 오랜 시간동안 나를 좀먹었다. 무기력해서 가만히 있는데 점점 더 무기력해지는 것만 같은 날들이었다.

나중에는 나도, 전 와이프도 서로 나는 집에 있고 전 와이프 혼자 친구들을 만나고 놀러다니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렇게 그는 다른 남자도 만나고, 당시의 나로서는 엄두도 낼 수 없었던 서핑도 배우고 그랬다. 버려진 것만 같았다. 사실 나는 내가 버려졌다고 느꼈다. 전 와이프는 여럿이 있을 때 내가 마지막에 남아있는 하나를 먹는 걸 싫어했다. 그런 과자같은 거 한 개 덜 먹어도 그만인데 꼭 하나만 남으면 오랫동안 아무도 손을 대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먹으면 자리에 없는 늦게 오는 누구를 주지 왜 먹냐든가 왜 혼자 제일 많이 먹냐든가 그런 소리를 몇번 했다. 아무도 그걸 내가 먹는 것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는데 그 사람만 그랬다. 나보다는 다른 친구, 다른 누구들이 더 중요한 것 같아보였다. 내가 아프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일정을 취소하거나 조정하는 등의 선택지는 애초부터 고려하지 않았다. 아니, 괜찮냐는 연락조차 거의 하지 않았다. 나와의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항상 당당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왜 그러냐고 도리어 화를 내곤 했다. 스킨십을 거절당하는 것이 싫어서 한달에 한두 번만 요청했다. 그러면 한달에 한두 번만 거절당해도 되니까.

한동안은 이 기억들이 떠올려질 일이 없었나보다. 지금은 직장에서도 잘 지내고, 게다가 일은 꽤 바쁘고, 연인과의 시간들은 늘 따뜻하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니까. 다른 관계들을 유지하는데 드는 에너지는 점점 줄이고 있다. 그런 관계들이 그렇게 필요하지 않아서 일부러 끊어낼 것까진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러 시간을 내어 약속을 잡고 또 만나면서까지 유지해야겠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직장도 안정되고 연인과의 관계도 안정되고 연인의 가족들과 종종 같이 식사하고 보드게임하는 시간들도 편안해서 이제 건드려질 것들이 많이 줄었나했다. 그러나 일상을 조금 벗어나고, 조금 다른 상황에 놓이니 또 금방 그런 것들이 있다. 그래도 이제는 거기서 서로가 어떤 과정에서 이렇게 행동하고 느끼게 되었는지를 바라보고 그런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가 있다. 잠시 잊고 있던 과거의 상처들이 건드려져서 아프다해도 여러 상처들이 잘 아물어가는 것을 바라봐온 지금은 그 상처를 꺼내고 바라보는 일이 그렇게 두렵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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