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0~2022

할머니

참참. 2022. 9. 15. 21:58

오랜만에 할머니를 뵈러 갔다. 할머니는 누워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아이고 아이고 하며 울고 계셨다. 고모가 그렇게 보고 싶어하던 손자 왔는데 왜 우시냐고 아무리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나를 잠깐 알아보셨다가 또 잊으셨다가 하며 계속 우셨다. 한동안 곁에 앉아 손을 잡아드렸다.

고모가 차려주신 저녁밥을 먹는 동안에도 한참 서럽게 우시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할머니는 100년이나 사시는 동안 몇번이나 마음 놓고 울어보셨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자 나도 서러운 마음이 되었다.

살면서 얼마나 서러운 일이 많으셨을까. 십대에 시집 와서 다 쓰러져가는 단칸방 집에서 시작해 죽어라 농사를 지으셨다. 자식도 일곱을 낳아 여섯을 성인으로 키우셨는데 지금은 셋밖에 안 남았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전쟁도 겪으셨다. 전쟁 때는 우리편 폭탄인지 적의 폭탄인지 구분도 안 되는 것이 떨어지니 그저 운에 따라 죽고 살았다고 했다.

공부를 하고 싶어서 야학을 잠깐 다녔는데 그 시절에 그렇게 똑똑해서 1등을 했다는 자랑을 여러번 하시곤 했다. 달력 뒷장에 삐뚤빼뚤하지만 멋들어진 글씨체로 쓰는 연습을 하시던 모습이 선하다.

새벽부터 밤까지 쉬지도 않고 움직이셨다. 감자전을 할 때면 감자를 한 다라이나 갈곤 하셨다. 강판에 감자 두 개만 갈아도 팔이 아프고 힘든데 도대체 어떻게 그러실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참 놀랍다.

그렇게 농사를 많이 지으면서도 마당 한켠에는 튤립을 또 심으셨는데 그것도 종이컵에 퍼담아 갖다파셨다. 붉은 튤립이 노란 튤립보다 값이 더 나간다는 얘기를 항상 하셔서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래서 화단엔 늘 노란 튤립이 더 많았다.

집 뒤 밭에는 중간중간 감나무가 여럿 있었는데 그 감도 역시 전부 따다 파셨다. 따다가 깨지거나 터진 것들은 우리가 먹었다. 장대도 안 닿는 높은 곳에 있는 감을 따려고 감나무에 올라갔다 크게 떨어져 다치신 적도 있지만 한 해도 감 따기를 그만두시진 않았다. 떫은 감은 껍질을 깎아 줄줄이 엮어 처마 밑에 매달아 곶감을 만드셨다.

이렇게 바쁘니 울 시간도 없으셨을 것 같다. 살면서 그렇게 서러웠는데 제대로 울지도 못하고 지나온 세월. 이제 지금은 잊고 그 서러웠던 시간들 떠올리며 울고 계신 걸까, 그때그때 마음 놓고 울 수 있었다면 좀 나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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