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0~2022

같이 산다는 것에 대하여

참참. 2022. 6. 26. 16:30

 

15년 전 고등학생이 되면서 부모님 집을 떠났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정말로 혼자 거주한 기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 1년이 채 되지 않는 것 같다. 기숙사나 하숙집에는 늘 룸메이트가 있었다. 혼자 살기 위한 월셋방을 얻은 적도 있었는데 이사 한달만에 갑작스레 살 곳이 없어진 친구가 들어와 같이 살게 되기도 했다.

생판 모르는 사람과 갑자기 한 방에 살게 되는 기숙사 생활이 제일 어려울 것 같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았다. 특히 대학교 기숙사 생활을 돌이켜보면 오히려 제일 편했던 것 같다. 고등학교 기숙사 생활은 그리 편하진 않았지만 견딜 만은 했다. 갑자기 같이 살게 됐던 친구는 꽤 친한 친구인데도 그리 쉽지 않았다. 결혼해서 같이 사는 게 제일 힘들었다.

물론 누구와 같이 산다는 것 외에도 그 시기마다 삶의 여러 상황과 맥락이 있으므로 단순하게 비교할 순 없다. 그럼에도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가장 처음 생각하게 되는 것은 역시 "기대"이다. 기숙사 룸메이트에게는 뭐 별로 기대하는 게 없었다. 방을 심각하게 더럽히거나 잠을 못 자게 하는 행동 정도만 서로 조심하면, 각자 침대에서 잠만 잘 뿐이니 크게 부딪칠 일이 없었다. 룸메이트랑 친해서 화기애애하게 수다도 떨고 하면 좋지만 안 그래도 딱히 아쉽지 않았다. 그런 건 굳이 룸메이트가 아니더라도 다른 데서 찾으면 되니까.

조금 안 맞더라도 견딜 만 했던 또 다른 이유는 정해진 끝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교의 한 학기는 3개월 반 남짓, 고등학교 기숙사는 함께 사는 기간이 더 길었지만 그래봐야 1년이었다. 어차피 얘랑 평생 같이 살 게 아니기 때문에 서로 적당히 예의 차리면서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친한 친구와 같이 살던 시절에는 1년쯤 됐을 때부터 슬슬 거슬리는 게 생기기 시작했다. 평생은 분명 아니겠지만 별일이 없는 한 둘 다 그 집에서 나갈 이유가 없었다. 살짝 반지하이긴 했지만 꽤 넓은 투룸이라 둘이 살기에도 충분한데 월세가 겨우 15만원이었고 집주인이 친한 형님이었다. 서울에서 그 월세를 포기하는 건 너무 힘든 일이었다.

그 방을 구하기 전에는 비공식 새아버지와 몇달 같이 살았었다. 그때도 역시 공짜로 살고 있었던 데다 수입도 마땅치 않았던 때라 언제까지 같이 살지 기약이 없었다. 별 거 아닌 잔소리도 가면 갈수록 은근히 거슬렸다. 그분 입장에서도 혼자 자기 입맛대로 살다가 누가 들어와서 기약도 없이 같이 살게 되니 당연히 자기 스타일대로 깔끔하게 해놓기를 당연히 원했다. 나중에는 그 집에 둘이 있는 것도 싫고 해서 퇴근하고 집 앞 피시방에서 시간을 보내다 집에서는 잠만 잤다. 아마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뭔가를 하고 있지 못하다는 자격지심도 있었지 싶다. 그러다보니 뭐하는 짓인가 싶어 얼마 안되는 월급임에도 서울에 월셋방을 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혼이야말로 그 정점이다. 평생 함께 사는 게 전제되는 데다 자연스럽게 높은 기대치까지 갖게 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집에 오면 양말을 아무데나 벗어던진다거나, 치약을 끝에서부터 안 쓰고 중간부터 눌러 짠다거나 하는 사소한 행동조차 이걸 한 학기도 아니고 평생 견뎌야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숨 막히는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앞으로도 이럴 것이라는 절망적 예측 속에서 내가 이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이 내 안에 자라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수십 년 다르게 살아온 타인들이 같이 생활하게 되면 모든 게 잘 맞을 리 없다. 그래서 같이 산다는 건 몹시 힘든 일이다.

그럼 혼자 살면 좋을까? 쉽게 결론 내릴 수 없다. 그 반지하에서 맞은 두번째 여름, 비 올 때마다 물이 차기 시작하는 바람에 탈출하듯 방을 구해 이사를 나갔다. 월세는 두 배가 넘게 올랐으나 방은 더 작아졌고, 친구와 함께 살 것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친구는 얼마 뒤 친척집으로 들어갔다. 친구만 버려두고 나오는 것처럼 돼서 미안했지만 방바닥이 세 번이나 물에 잠기는 동안 이미 심리적으로 한계에 도달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는 둔한 나조차도 내 삶이 바닥에 발을 붙이고 있는 게 아니라 둥둥 떠서 부유하고 있다고 느꼈다. 어디에도 내가 쉴 곳이 없다는 것, 하루 중 어느 순간도 편안할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낯선 동네에 혼자 살기 시작한지 일주일도 채 안 되었을 때, 나는 집 앞 골목에 있던 마을커뮤니티 공간에 대뜸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어느새 이문동 청년공동체 '도꼬마리'의 회원이 됐다. 퇴근하면 혼자 사는 방에 곧장 들어가는 날보다 그 앞 골목에 있는 도꼬마리에서 죽치고 앉아있는 날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재개발이 예정되어 고장 난 가로등도, 군데군데 깨진 도로 포장도 고치질 않던 그 골목에 정을 붙인 건 도꼬마리 덕분이었다. 좋은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된 멋진 일이었지만, 얼마나 외로웠으면, 얼마나 좋은 관계가 필요했으면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 싶은 마음이 든다.

이제야 낡고 방치된 듯한 골목의 늘 어둠침침한 느낌이던 그 방을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걸 알겠다. 아무리 열심히 청소해도 밝고 깨끗한 느낌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하루동안 본 세 지역의 열 개도 넘는 방 중에 출퇴근 거리와 내 월급 수준을 고려했을 때는 그게 최선이었다. 그때의 나로서는 그랬다. 그리고 어쩌면 그때의 내가 진짜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그러니 나는 나를 보러 그 방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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