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0~2022

설날

참참. 2022. 2. 1. 22:00

 

이번 설연휴는 애인인 재인과 보냈다. 연휴 시작하는 토요일날 재인의 가족들을 뵙고 저녁 먹고 와서(우리 가족은 그 전주 토요일에 동생네 집 집들이 겸해서 만났다.) 일요일부터 화요일 점심까지 둘이 같이 보냈다. 함께 장을 봐와서 재인이 해주는 밥을 함께 먹고, 술도 한잔 하고, 영화 '포레스트검프'와 애니메이션 '엔칸토', 미드 '그레이 아나토미' 시즌1을 함께 보고, 책도 읽고, 책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일기도 쓰고, 5km 달리기도 했다. 2월부터 시작하는 새해 빙고도 함께 써봤다. 새해빙고는 김신지 작가님이 <평일도 인생이니까>에서 소개한 것으로 새해에 이루고 싶은 목표를 빙고판에 적고 달성하면 X표를 쳐서 친구들과 누가 빙고를 많이 달성하는지 공유해보는 것이다. 우리는 초심자이므로 3 X 3 빙고판을 만들어 9개씩의 새해목표를 써보았다.

평범하고 따뜻한 나날이었다. 이 평범한 나날을 평생 찾아헤맨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평범한 것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느새 이런 날들이 곁에 와있다는 것이 한없이 신기하다. 뭘 특별히 하지 않아도 아쉬울 정도로 시간이 빨리 갔다. 함께 보고싶은 것도 많고, 또 뭘 보지 않아도 그냥 이야기 나누고, 그냥 옆에 있고, 각자 책을 읽고, 그런 것만으로도 참 좋다. 각자 책을 읽는다면 굳이 같이 있을 필요가 있나 싶지만, 곁에 있으면서 책을 읽고 있는 것도 혼자 있으면서 혼자 책을 읽는 것과는 또 다른 따뜻한 시간이다. 그런 걸 몰랐다. 너무 흔하고 평범하게 반복되던 가족과 함께 보내는 따뜻한 일상같은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이제서야 정말로 느끼고 있다.

토요일날 재인의 가족들을 보러 갔는데, 어쩐지 내 아버지쪽 친척들이나 어머니쪽 친척들을 만날 때보다 훨씬 더 편안한 기분이었다. 명절에 가족들을 만나는 것은 여태까지의 내게는 매우 불편하거나 아니면 썩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어렸을 때는 그래도 세뱃돈이라든가 맛있는 음식이라든가 또래 친척들을 만나서 놀 것을 기대하던 마음도 있었던 것 같은데, 스무 살 이후로는 거의 만나러 가지도 않았지만, 늘 별로였다. 특히 술을 잔뜩 마신 중년남성들을 상대하는 건 그 중에서도 가장 별로인 일이다. 그 분들 사는 거 힘든 거 알겠어서 짠한 마음도 없지 않지만 그래도 역시 즐거움과는 거리가 먼 일임은 어쩔 수가 없었다.

왜 그럴까 재인과 이야기도 나눴다. 그 집에서는 내가 어떤 사람이어야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느낌이 든다. 사실 재밌게도 나에 대해 그렇게까지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그냥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하는 역할이 없으니 내가 어떤 행동을 해서 실망시키거나 욕을 먹거나 그럴 걱정도 없고 분위기를 띄워야할 것 같은 그런 것도 없고 잔소리같은 것도 없다. 이번에 갔을 때도 그저 맛있는 걸 같이 먹고, 각자의 새해 소망이나 각자가 원하는 자기 자신이 죽고 난 이후의 장례절차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재인 어머님께서 새해 소망은 "다른 거 없고 그냥 가족들 건강하고 이렇게 한번씩 모여서 좋은 시간 보내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옆에서 시시하다는 장난스런 야유가 나왔지만, 그리고 나 역시 TV에서 늘 보면서 뻔하다고 생각하던 그 말씀이 어찌나 마음에 와닿던지. 어떤 가족행사에서도 그런 말이 와닿아본 적이 없었는데.

홍삼이며 배며 빵이며 초콜릿이며 와플이며 와인까지, 어머님과 재인의 언니께서 챙겨주신 건 또 얼마나 많은지, 택시를 타고 와야했다. 어르신들이뭔가 싸주시는 건 그동안도 겪어보지 않은 것이 아닌데 이상하게도 여태까지 경험했던 그 어떤 가족들보다도 더 가족같은 느낌이다. 이런 게 사람들이 말하는 가족의 따뜻함인가 싶게. 재인 막내동생의 캐나다 워킹홀리데이 새해 소망보다 어머님의 가족들 잘 지냈으면 한다는 소망이 더 와닿는 나 자신을 낯설게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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