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0~2022

요즘

참참. 2022. 1. 28. 07:13
 
요즘 선물받은 예쁜 노트에 좋은 구절들을 필사하기 시작했다. 책의 내용을 펜으로 옮겨적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나중에 검색해볼 수 있는 형태의 기록을 더 선호하지만 펜으로 따라적어가는 것은 또 그만의 맛이 있다.
책은 고등학생 때는 최고의 도피처였고, 그 뒤로도 거의 언제나 즐거움과 깨달음을 주었다. 그렇게 책을 많이 읽지는 않지만 책 얘기를 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웠다.
몇달 전부터 매일 비타민제를 챙겨먹기 시작했다. 달고 살던 피로감이 확실히 덜한 느낌이다. 문득 책을 읽는 것은 마음의 영양제를 챙겨먹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영양제를 한번 먹어서는 큰 의미가 없다. 매일 먹어야한다. 밥도 아무리 잘 먹어도 내일이면 또 배가 고프고, 사랑도 아무리 받아도 내일 또 고프듯이, 책을 오늘 읽어도 내일이면 잊는다. 그래서 또 읽어야한다. 이 순간을, 오늘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할지 <평일도 인생이니까>를 읽으며 생각한다.
회사에서 10년을 근속한 사수가 1월말까지인 1달의 장기근속휴가를 끝으로 퇴사한다. 나와는 다른 영역을 맡고 있지만 그나마 3년차 정도된 다른 선배개발자분도 아내가 곧 출산이라 자주 자리를 비운다. 이번주와 다음주엔 내내 없다.
도와주시는 외주업체 대표님과 작년 11월에 입사한 신입개발자가 한분 계시긴 하지만, 작년 5월에 입사한 내가 이젠 반강제로 우리 회사 시스템의 실무담당자가 됐다. 회사 내 모든 부서와 모든 연동돼있는 시설들의 모든 종류의 에러 확인 요청이 나에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꽤나 정신이 없다. 연동해놨던 게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끊어지는 악몽을 꿀 정도다.
CTO는 꽤 멋진 분이신데 요즘 개발자 뽑기가 너무 힘들다고 한다. 계속 구하고 있지만 안 구해진다. 최근엔 베트남 개발자를 한국에 취업연결해주는 업체와도 미팅 중이시다. 정말로 베트남 개발자분과 일하게 된다면 그것도 좋은 경험일 것 같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이 하루하루가 내 인생이라는 걸, 또 반짝이는 순간들이 있고 단순히 일만 하면서 지나가고 있는 시간이 아니란 걸 기억한다.
<아무튼 비건>을 읽었더니 더이상 비건에서 도망칠 수 없게 됐다. 내가 소비하는 모든 것들, 내 삶을 이루고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이 내가 동의하지 않는 사회를 유지하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자괴감과 좌절감을 가진 시절이 있었다. 변명이지만 살 수가 없어서 내려놨다. 비겁하게도 너무 많은 걸 알게 되지 않으려 조심했다. 알고나면 불편해지니까.
페미니즘과 비거니즘은 이 시대의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정신이라고 느낀다. 어떻게 해도 이제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다행히 나의 겨우 '불편함' 정도는 다른 존재들이 겪는 고통에 비하면, 내가 이 정도도 감당하지 못해서는 안되겠다는 의지를 다지게 된다. 주변을 약간 둘러볼 수 있는 그 정도의 여유를 다시 얻었다.
속초에 다녀온 재인이 김혼비 작가님의 <다정소감>을 선물했다. 제주여행갔을 때 책방 소리소문에서 앞부분 조금 읽다가 고민 끝에 정여울 작가님 책을 고르고선 놓고 왔는데, 그 조금 읽었던 글이 자꾸 생각나서 사올걸 후회하던 책이다.
축구 이야기였는데, 30대인 작가님이 축구를 같이 하는 40, 50대 언니들에게 "너도 내 나이 돼 봐, 나도 너 나이 때는 전반밖에 못 뛰었는데 이젠 풀타임 뛰고도 거뜬해" 같은 말을 듣는 이야기다. 읽자마자 빵 터졌다. 항상 그 나이대 분들에게 나이 드니까 몸이 힘들다는 의미로만 들어왔던 그 말을 완전히 반대로 쓰시다니.
빵 터지고 끝이 아니라 여운이 길었다. 나도 20대엔 안 먹던 비타민제를 챙겨먹지만 결코 2, 3년 전과 비교하면 체력이 떨어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점점 좋아지고 있다. 최근엔 더더욱 그렇고 조금만 더 운동을 한다면 더 좋아질 거라는 게 막 느껴지는 기분이 든다.
<평일도 인생이니까>에서도 "나는 이제 다가올 나이를, 아직 가 보지 않은 여행지에 대해 말하듯 얘기하고 싶다."는 구절이 나온다. 그 전에는 <송해 1927>을 보면서 지금 행복한 어른이 노인이 되어서도 행복하겠구나(지금 행복한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도 행복하다), 나름대로 행복하게 노년을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우리가 나이듦에 대해 끝없는 불안과 혐오를 다소나마 진정시킬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 외에는 오랜 시간동안 서로의 곁에 있는 어떤 관계를 잘 유지해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간다. 관계만큼 중요하고 어려운게 없으니! 정혜신&이명수 두 분의 인터뷰가 참 재밌다. 이은영&김용택 <내 곁에 모로 누운 사람>도 신기해하며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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