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0~2022

피아노 연주회

참참. 2021. 12. 5. 22:30
 
2008년 이후로는 얼굴은 고사하고 따로 메시지도 주고받은 적없는 고등학교 친구의 피아노 연주회에 갔다. 친구는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생명공학 연구소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그리고 서울에서 피아노 연주회를 열었다. 무슨 바람인지 별 고민도 없이 DM을 보냈다. 그래도 신기하게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서로 인스타를 팔로우하고 있었던 덕분이다.
친구는 너무 기대는 하지 말라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사실 나는 어떤 것을 기대해야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내 일상에서 누군가가 눈앞에서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는 걸 볼 일은 좀처럼 없단 걸 새삼 깨달았다. 하물며 클래식은 더더욱. 세상이 좋아져서 유튜브로는 손열음도 볼 수 있지만.
가사도 없이, 피아노 한 대와 사람 한 명이 전부. 딱히 설명도 없이 바로 연주가 시작됐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생소했다. 무슨 생각을 해야할지 뭘 느껴야할지 몰랐다. 프로그램 노트가 있었는데 미리 다 읽어볼 수 없어서 아쉬웠고, 연주할 곡들을 한번씩이라도 들어보고 올걸 하는 생각을 했다. 귀에 익숙하게 느껴지는 곡은 한 곡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도 잠시뿐, 어느새 다 읽지 못한 프로그램 노트도 생소함도 다 잊었다. 점점 공간을 가득 채우는 음악에 빠져들어갔다. 심지어 일어나서 인사를 하기 전까지는 어느 곡이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지조차 몰랐음에도 그랬다.
건반 위를 움직이는 손을 바라보는 듯 바라보지 않는 듯, 시각으로 받아들이는 자극은 최소화되고 묘한 몰입 상태가 됐다. 단 한 사람이 단 하나의 악기만으로 이 공간과 시간을 이렇게 가득 채우다니.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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