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즈음 처음 맹모삼천지교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속으로 크게 공감하지 못했었다. 무슨 얘긴지는 알겠지만, 어떤 환경에 있더라도 스스로의 의지가 더 중요한 거 아닌가하고. 갈수록 그게 무슨 얘긴지 더 알겠다. 어린 아이들은 정말 뭐든 보고 그대로 배운다. 근데, 어른도 마찬가지다. 나를 어디에 놓아두느냐, 어떤 사람들의 곁에 있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 점점 더 깨달아가는 요즘이다.
돌아보면 사랑했던 사람들에게는 늘 무언가를 배우거나 그들을 닮아갔던 면이 있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사람은 내 어딘가에 남아있다. 별로 체감하지 못했는데, 분명 그런 것 같다. 군대에서 헤어졌던 첫사랑은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았다. 내가 20대 초반부터 페미니즘 책들을 접할 수 있었던 건 그의 영향이 가장 컸다. 다들 사랑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말로, 글로, 그림으로, 음악으로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세상의 아름다움을 내게 보여줬던 것 같다고, 이제야 그렇게 생각이 든다. 강렬한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관계라는 거,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영향을 새삼스럽게 실감하고 있다.
내 사랑의 기억들은 아프거나 슬프게 끝난 경우가 많았던 거 같다. 그럼에도 소중한 추억이고, 배움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그 기억을 돌아볼 때 슬픈 마음이 들었을 뿐이다. 근데 마치 영화 인사이드아웃에서 기억 구슬의 색깔이 변하듯이, 그 기억들을 돌이킬 때마다 거기 깃들어있다고 느꼈던 슬픔이 조금씩 옅어지고 있다. 그것들은 더이상 "슬픈" 기억이 아니라고 누군가 얘기해주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많은 책과 강연과 영상에서 일상을 소중하게 여기라는 메세지를 받았고, 거기에 감동도 느꼈지만 지금처럼 잔잔한 일상에 내 마음을 두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마음을 두고 싶다고 생각을 해도 도무지 어떻게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는 게 더 맞겠다. 지금의 마음으로 돌아보면 그동안 나는 '일상'이란 무언가 사건이 없는 시간, 이를테면 전반전과 후반전 사이의 쉬는 시간 같은 것이라고 느껴온 것 같다. 뭔가 사건이 생기길 기다리는 시간. 그래서 내 삶에 이제 일상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절망스러웠 건 아닐까. 마치 삶이 끝난 것처럼.
단호박을 잘라 에어프라이어에 넣어 시간을 맞추고, 물을 끓여 면을 삶고, 접시를 꺼내 예쁘게 담을 준비를 하고. 나 혼자 먹더라도 그렇게 예쁘게 담아서 하나하나 음미하며 먹고. 그런 것 하나하나가 다 즐거운 일일 수 있다는, 도저히 "배울" 수 없을 것 같았던, 그래서 영영 도달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그런 마음이 어느새 내 안에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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