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0~2022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참참. 2021. 6. 21. 22:00

어제,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봄이면 두릅을 보내주시곤 하는 홍천의 소금쟁이님 전화였다. 농사 지으랴 살림하시랴 아이 키우랴 바쁘신 걸 너무 잘 아는데, 생일이라고, 그리고 걱정해서 전화를 다 주시다니.

최근 십대 초반인 딸에게 사과를 했다는 얘길 해주셨다. 딸이 더 잘하길 바라는 마음에 한 얘기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불안을 딸에게 투사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고. 자신이 어릴 때 들었던 얘기들, 그것들로 인해 자존감이 낮아진 게 아닐까 하고 생각이 드는 그런 얘기들을 딸에게 똑같이 하고 있었다고, 물려주고 있었다고. 그래서 솔직하게 얘기하고 사과를 하셨다고 했다. 지금으로도 너는 충분하다고 말해주셨다고. 너무 멋있다고 생각했다. 항상 멋진 분이라고 생각했지만, 새삼 또.

같이 글쓰기 모임을 하던 때가 생각난다. 서너 명이서 논바닥에 둘러 앉아 서로 써온 글을 읽고 감상도 나누고. 자기 삶이 담긴 글이라 하나하나가 다 좋았다. 말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글로 쓰는 걸 좋아한다. 뭔가 쓰고싶은 이야기들이 떠오를 때의 그 느낌이 좋다. 가장 알맞고 예쁜 단어를 고르고 고르는 시간도 맘에 든다. 물론 제일 좋은 건 다른 사람들이 좋게 읽어줄 때다.

힘이 없었기 때문에 통화할 때 목소리에도 힘이 없었다. 그걸 느끼셨는지 위로가 되는 말은 하나도 못 해주는 것 같다고 하셨지만, 아니다. 비록 목소리로는 표현하진 못했지만 한 통의 전화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생일선물로 사달라고 해서 요즘 읽고 있는 책 <우울할 땐 뇌과학, 실천할 땐 워크북>(앨릭스 코브) 28쪽에는 약식 우울증 진단표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여기 소개하는 내용은 우울증과 관련된 증상을 해결하는 데 유용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인생이 살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 때는 정신건강 전문가든 친구든 가족이든 상관없이 당장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는 것입니다.”

왠지 울컥했다. 그렇지……. 게다가 나처럼 수다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말해 뭐해.

 

오늘은 바빴다. 일하느라 바쁘다니, 웃기지만 이런 바쁜 느낌이 오랜만이었다. 금요일에 받은 일이었는데, 마감이 오늘까지였다. 내일부터 당장 시작하는 이벤트 페이지의 기능을 다 구현해야했다. 회원명부에 있는 전화번호만 신청가능하게 만들고, 중복으로 신청 들어오는 전화번호를 걸러내고, 이상한 걸 입력하지 못하게 막고, 한정수량만큼 신청이 끝나면 더이상 신청이 되지 않도록. 그리고 최근 퍼블리셔가 퇴사해서 달리 해줄 사람이 없으므로 글자들의 크기와 간격을 조정하는 등의 요청사항도 처리해야했는데, 세상 간단해보이지만 꼭 내가 뭔가 하나를 조정하면 다른 게 틀어져버리곤 해서 항상 곤란하게 느껴지는 일이다.

우여곡절 끝에 다 만들었는데 내가 짠 소스코드는 내가 봐도 엉망이었으나, 어쨌거나 작동은 됐다. 코드리뷰에서 얼마나 부끄러울진 모르겠지만, 리뷰를 통해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곳에 다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일 아닌가.

 

점심에는 밥 같이 먹는 멤버들이 둘 다 안 계셔서 기획자분이 챙겨주셨다. 입사하고 처음으로 개발자, 인사담당자가 아닌 직원분들과 식사를 했다. 다녀보니까 괜찮냐고 물으셨는데, 나에게 비교대상은 직전 회사밖에 없어서 좋다고 했더니 다들 어쩐지 떨떠름해하는 느낌이었다. 하긴, 나도 시간이 더 지나면 이 회사에도 불만이 분명히 생기겠지. 이 분들도 그동안 보아온 것들, 쌓여온 것들이 있겠지. , 근데 솔직히 아무리 생각해도 전 직장보다는 좋은 것 같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뭐가 그리 좋냐고 해서 나도 모르게 “평화로워서 좋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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