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애니메이션 영화 ‘너의이름은’을 다시 봤다. 요즘 참여하는 심리학모임에서 보고 오기로 한 영화 중 하나여서다. 전에 봤을 때는 꽤 재밌게 봤었고, 이번에도 뭐 나쁘진 않았지만, 보고나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더 이상 운명적인 사랑을 믿지 않는구나.
로맨스를 좋아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해피엔딩인) 로맨스는 서로를 그리던 두 사람이 마침내 만나거나 사귀게 되는 이야기 혹은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우여곡절 끝에 결혼하게 되는 얘기다. Happily ever after, 왕자와 공주는 결혼해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로 끝난다는 얘기다.
현실에서는 운명적인 만남도 어렵고, 우여곡절 끝의 결혼도 어렵지만 그러고 나서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지 않는다. 엔딩을 모르는 채로 이어지는 삶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좋은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는 것이야말로 앞의 그것들보다 더 지난한 일 아닐까.
당신의 곁이기만 하다면 어떤 것도 다 괜찮아, 라는 마음이 들 때도 분명 있다. 그게 거짓은 아닌데,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그 마음은 지나가있다. 그게 자꾸만 지나가고 변한다는 것은 내겐 늘 슬픈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걸 무서워하지는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아니, 그럼에도 그 열정이 끝나고 나도 분명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끝내 끊어지지 않는 어떤 연결이 남아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존 스칼지의 SF 소설 ‘노인의 전쟁’은 지구에서 노인들이 우주개척방위군에 자원입대를 하면 강화된 젊은 육체에다 모종의 기술로 기억과 정신을 옮겨주고 그들이 우주에서 전쟁을 벌인다는 얘기다. 사실 배경설정, 결말 같은 건 정작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아래와 같은 문장만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내 결혼 생활도 누구나처럼 오르락내리락이 있었지만, 깊이 들어가보면 바닥이 단단하다는 걸 알고 있었어. 난 그 안정감이, 그리고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그리워.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것들에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무슨 의미인지,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인지가 포함되어 있어. 난 누군가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사람이었던 시간이 그리워, 날 인간답게 했던 부분이 그리워. 그게 결혼 생활에서 그리운 부분이야.”
군대에서 우연히 봤던 책이니, 지금으로부터 거의 10년 전에 읽었던 책인데 저 문장이 결혼에서 내가 기대하는 최소한의 것이 됐었나보다. 무려 저걸 최소한으로 설정했으니 내가 얼마나 사랑과 결혼에 대해 얼마나 어마무시한 낭만과 판타지를 갖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서로를 애타게 찾아 헤매던 주인공들이 마침내 운명적으로 만나면서 끝나는 이야기를 보면 한편으로 감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뒤에 연인 혹은 부부가 된 그들의 일상을 생각해보곤 한다. 때로는 그 뒤가 파국일 것 같아서 혼자 괜히 씁쓸해지기까지 한다. 운명적이고 짜릿한 만남은 여전히 판타지의 대상이지만 이젠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을 찾아다니는 것보다는 일상을 건강하게 만드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느낀다. 물론, 그 ‘건강한 일상’이라는 것도 어떨 때는 판타지와 별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멀게만 보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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