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0~2022

취직턱

참참. 2020. 4. 15. 06:53

 

서울로 돌아왔을 때 밥을 사줬던 직장인 친구 H에게 취직 기념으로 밥을 샀다. 퇴근이 살짝 늦어져서 약속에 조금 늦었는데 그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여줘서 내 마음을 편하게 해줬다. 만나기로 한 건물 앞에서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이 안 그래도 지적인 이미지를 한층 더 그렇게 만들어줬다. AI에 대한 책이었던 것 같은데.

그도, 나도 예상하지 못했던 내 빠른 취직에 대한 이야기, 코로나로 취소된 그의 여자친구와의 뉴욕여행 이야기를 빙자한 동북아시아 허브공항에 대한 내가 전혀 몰랐던(내가 작년에 네덜란드에 갈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구나) 국제적인 상황, 투표에 대한 이야기와 꼭 정치가 아니더라도 20대 때보다 어딘지 보수적인 사고로 조금씩 밀려가는 우리에 대한 이야기. 스타벅스에서 색깔이 맘에 드는 체리블라썸 루비 초콜릿을 마시면서.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그의 입으로 들으니 해외여행도 몇번 가보지 않은 내 지난 삶이 퍽 스펙터클하게 느껴졌다. 20대에 학교를 그만두고, 활동가로 살고, 결혼을 했다가 이혼을 했으며, 귀촌을 했다가 다시 서울로 왔고, 이전까지는 거의 문외한에 가까웠던 전혀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고 그걸로 취직까지 했다고 정리하니까. 이제 두 달 후면 만으로 서른이 된다. 서른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진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어쩐지 자꾸만 20대 시절과 분리해서 비교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때로는 지금은 도저히 가고 싶지 않은 그 길로 조금씩 밀려간다고 해봤자 그렇게 멀리 가지는 않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들면서도, 때로는 이대로 가다가는 내가 그렇게 싫어했던 그것들과 뭐가 다르지 싶은 그런 삶이 되는 건 아닐까 걱정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렇게 멀지 않은 언저리에서 우린 잘 살 것이다. 그럭저럭 직장인 다 됐다고 자조를 하면서도, 좋아하는 사람들을 챙기고 우리의 합리와 이성과 사람과 사회에 대한 애정을 조금 지치고 식긴 했지만 여전히 품 속에서 따뜻하게 데워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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