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라는 책읽기/~2008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참참. 2013. 5. 9. 18:28


* 이 글은 2007년에 쓴 글입니다.

* http://blog.naver.com/kimjh620/20044658433



천 개의 찬란한 태양

저자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출판사
현대문학 | 2007-11-2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피워낸 두 여자가 만들어내는 인간드라마아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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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슬프다, 정말 슬프다. 소설의 초반부를 막 벗어나면서부터 눈가에 살짝 맺힌 눈물을 의식하며 옮긴이의 말까지 읽은 후 마지막장을 덮을 때까지 내 마음을 지배했던 감정은, 슬픔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아름다웠다. 비 온 다음날의 이슬맺힌 숲 속의 풀잎처럼 아름다웠다.

 

지독한, 정말 지독히도 불행한 일들로 채워진 삶. 그래도 살아감, 감내하고 살아가며 희망을, 사랑을 그리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붙잡는 두 여인. 처음으로 서평을 쓰며 진지하게 내가 이 아름다움을, 이 감동을 제대로, 아니 일부라도 표현해낼 수 있는 글을 쓰기는 무리라는 걱정이 든다. 순수한 마음으로 이 글을 읽으시는 분께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다. 이 글을 읽을 정도로 이 책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셨다면 반드시 읽어보시라고, 빌려서라도 읽으시라고 말이다. 이런 말조차 스스로 듣기에도 너무나 광고문구 같다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아-, 이 소설은 아프간의 전쟁과 아픔, 여성의 역사다. 이 소설은 한 편의 멜로드라마이면서 너무나도 고난한 삶의 진실된 기록이다. 이 소설은 눈물처럼 반짝이는 보석이다. 너무 흥분한 듯싶다. 이 밑으로는 좀 더 차분하게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이 소설을 색깔로 표현하자면 회색쯤 될 것이다. 첫 문장에서 이야기했듯 슬픔이 이 소설의 주된 정서인 것이다. 그러나 사랑과 평화를 산 속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새소리처럼 노래하는 듯하다.

 

어머니 나나가 잡일을 하던 집의 주인과 일을 저질러 태어난 아이, 마리암. 그 남자는 이미 정실부인만도 셋이나 된다. 나나와 마리암은 작은 오두막에서 따로 살고, 아버지 잘릴은 종종 찾아와 선물도 주고 달콤한 말을 속삭인다. 반면 엄마인 나나는 항상 잘릴과 삶에 대해 부정적이고 거친 말만 한다. 어린 마리암은 아버지를 너무나 좋아하게 되어 결국 아버지의 집을 혼자 찾아간다. 죽어버리겠다는 엄마도 놔둔 채 말이다. 그러나 잘릴은 문 안으로 그녀를 들여보내주지 않았고 길바닥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결국 버려진 것을 깨닫고 운전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간 마리암이 본 것은 자살한 엄마의 시신이었다는 암울한 사건으로 시작하는 이야기. 그런데 그 이야기는 끝도 없이 점점 더 비참하고 처절한 상황으로 치닫는다. 서로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의 쓴 맛을 본 뒤 역시 그 쓴 맛의 한가운데서 서로 만나는 마리암과 라일라. 둘은 그 후에도 여전히 혀가 마비될 만한 쓴 맛들에 노출되지만 사랑하고 사랑받는 아름다운 관계를 이어나간다. 믿고 의지하며 서로를 삶의 의미로 삼는 그들. 결국 사형당하지만 마음의 평화를 찾는 마리암과 그 뒤 마리암의 행적을 기억하며 꿋꿋하게, 행복을 얻고 살아나가는 라일라. 그러는 사이 어느새 현대 아프간의 역사는 불과 얼마 전인 2002년까지 올라온다.

 

이 아름다움을 구성하고 있는 조각들. 읽으면서 가슴이 울렁거림을 느꼈던 몇몇 구절들.

 

'지붕 위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달들을 셀 수도 없었고

벽 뒤에 숨은 천 개의 찬란한 태양들을 셀 수도 없었네.'(259쪽) - 사이브에타브리지라는 시인이 17세에 카불이라는 도시에 대해 썼던 시의 일부라는 설명.

'눈과 함께 연들이 찾아왔다. 한 때는 카불의 겨울 하늘을 지배했지만, 이제 연은 로켓탄과 전투기들이 점령해버린 하늘에서 겁에 질린 침입자 신세였다.'(309-310쪽)

'그녀는 아지자가 말을 더듬던 것에 대해 생각했다. 아지자는 전에 단층에 대해 얘기하며, 지구의 아래쪽에서는 강력한 충돌이 있지만 우리가 표면에서 느끼는 건 약간의 흔들림일 뿐이라고 말했었다. 아지자도 그랬다.'(443쪽)

'결국 말이 말랐다. 그러나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라일라가 할 수 있는 건 도무지 공격할 여지가 없는 어른의 논리에 압도당한 어린애처럼 백기를 들고 우는 것뿐이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돌아누워 마리암의 따뜻한 무릎에 마지막으로 얼굴을 묻는 것뿐이었다.'(489쪽)

'마리암이 말했다. "나를 위해 아지자에게 입맞춤을 해줘. 그 아이는 내 눈의 누르(빛)이자 내 마음의 술탄(황제)이라고 말해줘. 나를 위해 그렇게 해주겠지?"'(490쪽)

'요셉은 가나안으로 돌아갈 것이니 슬퍼하지 마라.

헛간은 장미꽃밭으로 바뀔 것이니 슬퍼하지 마라.

살아있는 모든 걸 집어삼키려고 홍수가 닥치면

노아가 태풍의 눈속에서 너희들을 안내할 것이니 슬퍼하지 마라.'(561쪽) - 하페즈라는 시인의 시의 구절이라는 설명.

 

나는 비겁하다. 결국 이렇게나 많은 인용을 범하고 말았다. 어쩔 수가 없다는 변명을 믿어주길 바랄 뿐이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때 학교에서 전교생에게(학교가 매우 작아 4~6학년 전원이 참여해야만 인원을 맞출 수가 있었다.) 반강제로 시킨 농악에서 키도 작은 편이고 몸도 약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징에 배정되었었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 오른쪽 어깨가 밑으로 처지고 가방끈이 흘러내리고, 고등학생이 된 지금까지도 몸의 균형이 맞지않고 오른팔은 돌리기만 하면 매번 우드득거린다. 나는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 내 팔이 이렇게 된 이유가 그 때 징을 오래 들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일단 그 이유를 알게 되자, 너무나 억울했다. 학교를 원망했다. 내 키가 지금 170이 못 된 것도 그 것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고나니 정말 그 때로 되돌아가서 전학을 가서라도 그 일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난 후, 내가 얼마나 행복한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아니, 그보다도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의 불행을 안고있고 그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삶에 대한 모습을 보게 되어 이 정도로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불평, 불만만 일삼은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고나 할까…

 

아프가니스탄. 9.11 세계무역센터(쌍둥이 빌딩)테러의 빈라덴과 탈레반이라는 무섭고 억압적일 것 같은 무장폭력단체가 떠오르고 별을 알지는 못하면서도 일단 부정적으로 생각되는 나라. 최근 인질사태 덕분에 라마단과 같은 풍습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으나 중동권과 이슬람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도 한층 더 강화되었었다. 그런데, 나의 오해와 몰지각을 드디어 풀 수 있었다. 물론 여자들에 대한 굉장한 억압은 사실이었지만, 그들만의 문화, 종교는 어디를 보아도 '나쁘'거나 '부정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우리와 같은, 정말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이 사실을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아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이 이야기를 진정 슬프게 느끼게 되는 것은 아프간의 비참한 현실에 대해 불쌍해하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 우리들의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인 것 같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땅을 밟으며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고, 경험하고 느끼게 되고, 목숨을 걸게 되는 것들을 외쳐대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 감동을 표현할 수가 없는 인간 언어의 불완전성과 한계(그러나 이 작가는 해냈으므로 어쩌면 내 언어구사능력의 그 것들)에 대해 슬퍼하며, 감정을 그대로 전달하는 텔레파시와 같은 능력이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았음을 불평하며 글을 맺으려 하는 이 나를 용서해달라고 할 수 밖에는 없겠다.

어둠 속에서 나그네의 길을 이끄는 북극성의 빛을, 그리고 가슴의 이 울렁거림을 당신도 똑같이 느낄 수 있기를 알라신과 모든 신께 기도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