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의 추억이라 하면 나도 떠오르는 커뮤니티가 하나 있다. 중학생 시절 한창 열심히 활동했던 한 게임회사 팬사이트다. 게임도 아니고 게임제작사의 팬사이트라니? 지금 생각하면 참 신기하게 느껴지지만 당시엔 아직 소위 CD게임이라고 하는 국산 패키지게임 시장이 조금은 남아있을 때여서 그런 일이 가능했다. 그러나 그 시장은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2000년대 중반 즈음엔 소멸해버리다시피 했다. 현재는 '스팀' 등의 훌륭한 플랫폼(더 이상 음악을 듣기 위해 '음반'이란 물건을 살 필요없이 온라인으로 비용을 지불하고 이용하는 것과 비슷한 게임 분야의 플랫폼)이 있지만 그런 게 없던 당시엔 불법복제 CD와 웹사이트나 P2P 등을 통한 불법다운로드로 게임을 이용하는 사람이 무척 많았고, 그런 문화가 소수 인원이 모여 밤을 새가며 힘들게 게임을 개발하던 스타트업 게임제작사들에겐 치명적이었다. 당연하지만 불법다운로드 받아 이용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게임제작사가 얻을 수 있는 수익이 적었기 때문이다.
CD에 들어있는 파일을 복사할 수 없게 막는 등 여러가지 노력도 했지만, 또 기필코 그걸 뚫어내서 공짜로 사람들에게 공유하고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았던 시절이었다. 일부 불법 공유를 심하게 하는 이용자들을 고소한 적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오히려 당시의 주 이용자층이 학생이었고 고소대상에 어린 학생이 포함된 탓에 오히려 여론의 역풍을 맞기도 했다. 하여튼 내가 활동하던 팬사이트가 열렬히 응원하던 게임제작사 역시 소규모 스타트업이었고, 돈이 되는 게임보다는 우리가 만들고 싶은 게임을 만들자는 열정 하나로 뭉친 젊고 자유로운 분위기의 회사였다. 그에 걸맞게 만들어낸 게임도 독창적이고 매력적인 그래픽, 게임 시스템과 여운을 남기는 스토리 등으로 나름대로 매니아층이 있었다.(여담이지만 당시 그 제작사에서 시나리오 쓰시던 분 가운데 한분은 그 뒤에 전업 SF소설가로 살아오셨는데 감히 한국 SF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분이라 할 만하다.)
그러다보니 해당 게임제작사에서 나온 게임들을 좋아했던 사람 가운데 그 게임들의 '공략'을 모으고 팬들끼리 소통하는 게시판도 있는 팬사이트를 만든 사람이 생겼다. 거기에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였고, 각 게임들을 아주 속속들이 파헤치고 불가능한 미션(30~40레벨이면 엔딩을 클리어할 수 있는데 99레벨 찍기라든지)에 도전한다든가, 최단시간 클리어 대결, 게임 내 숨겨진 이벤트 전부 다 찾기 등을 하며 재밌게 놀았다. 게임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배경을 가지고 일종의 팬픽같은 소설을 써서 서로 읽기도 하고, 라이브채팅방도 있어서 실시간 채팅을 하며 놀기도 했다. 나중엔 '정모'라고 해서 서로 오프라인에서 만나서 노는 사이가 됐고, 시간이 흘러 한두 명씩 대학에 가고 군대에 다녀오고 취직을 하여 직장인이 되는 걸 지켜봤다. 처음 정모에 갔을 땐 강원도에 사는 고등학생일 뿐이었는데 서울까지 그 사람들을 보러 갔던 게 지금 생각해도 재밌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자주 업데이트를 하지는 않아도 꾸준히 사이트의 호스팅비용을 내며 사이트가 없어지지 않도록 관리하던 운영자분도 1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는 중에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갑자기 접속이 되지 않는 사이트, 거기 있던 공략들, 소설들, 추억들(흑역사들)도 사라지고, 아쉬운 마음에 누군가 네이버카페를 만들어 그나마 방황하던 사람 몇을 모으고, 남아있던 자료도 모으고, 카톡방도 만들었다. 나는 몇년 전 그 카톡방에서 나온 이후로는 그 커뮤니티와는 완전히 연결이 끊겼다. 지금 아마 그때처럼 카톡방에서 가끔 안부를 주고받고 시간이 맞으면 가끔 몇명씩 만나는 정도가 아닐까싶다.
돌이켜보면 그렇게 오프라인 모임까지 하고 긴 세월동안 이어진 것은 적지만 그밖에도 수많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활동해왔다. 그동안 즐겼던 그 많은 온라인게임에서 난 거의 언제나 '길드'나 '클랜'이라 불리는 모임에 가입해서 적극적으로 그 안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게임을 즐겼다. 사실상 게임하는 시간보다 귓속말 등의 기능을 이용해 수다 떠는 시간이 더 길지 않았나 싶을 정도여서, 실제로 같이 게임을 하던 고교 동창 친구보다 플레이타임은 훨씬 더 긴데 레벨은 더 낮았던 적도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이미 이메일 펜팔을 하다 손편지까지 주고 받았던 친구들도 있고, 게임 내에서만 알다가 직접 만나거나, 내 결혼식에까지 왔던 친구도 있다. 그렇게 만났던 거의 대부분의 사람과 지금은 연락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몹시 열심이었고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왜 그렇게 열심히 했을까? 이야기 잘 통하는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걸 원체 사랑하기도 하지만, 거기서 오는 소속감이 상당했다. 논리적으로만 따지면 집단이란 건 실체가 불분명한 경우가 많고 결국 인간은 개인이라는 점에서 소속감이라는 감정은 비이성적인 면이 있지 않나 생각한 적도 있는데, 곰곰이 돌아보면 나 역시 소속감 느끼는 것을 좋아한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 가족, 우리 학교, 우리 학과, 우리 동네, 우리 지역, 우리나라, 우리 회사, 우리 동호회, 우리 교회, 기타 등등, 기타 등등. 혹시 소속감이란 인류가 집단을 이루고 살아온 긴 세월이 우리 유전자에 남긴 유산일까? 나는 분명 내가 어딘가에 소속되어있고 내가 그 안에서 의미있는 존재라는 감각을 느끼고 싶을 때가 있다. 해당 집단의 끈끈함의 정도나 내가 느끼는 애정의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내가 그 안에서 썩 의미있는 존재가 아닌 것 같을 때는 상처를 받기도 한다. 온라인 커뮤니티뿐 아니라, 학교 친구들 그룹, 활동했던 동아리와 단체들까지, 난 그간 소속감을 꽤 열심히 추구하지 않았나 싶다. 생각할수록 묘한 소속감의 문제, 지금은 이런저런 고민을 해보는 정도지만 앞으로 이 특별한 감정에 대해 더 알아가고 싶다.
'일상 > 2020~2022'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가짐 (0) | 2020.02.26 |
---|---|
고양이 (0) | 2020.02.25 |
가진 적 없었던 것들 (0) | 2020.0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