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라는 만남

어디서 잘 것인가 - 암스테르담1

참참. 2020. 2. 9. 08:13

어디서 잘 것인가

 

출국하기 전날밤까지도 암스테르담에 도착해 첫날 묵을 숙소가 완전히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출국하는 날 새벽이 되어서야 거기서 지낼 수 있다는 페이스북 메시지를 받았다. 출국 전날 김포공항 근처에 산다면서 흔쾌히 재워줬던 형은 나 같으면 당일 숙소도 예약이 안 된 상태로 가느니 비행기를 취소하겠다며, 내 대책없음을 퍽 신기해했다. 그 형이 해외여행 정말 많이 다니는 사람이라 나도 스스로에게 겁이 났다.

변명하자면 비행기표를 예매하고나서 출국하기까지 2주동안 내가 숙소 구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돈이 없다는 생각에 호텔같은 걸 안 찾고 더 저렴한 방법을 찾으려다보니 시간이 질질 끌렸다는 거다. 첫번째로 시도한 것은 카우치서핑이었다. 줄여서 CS라고도 부르는데, 말 그대로 여행지에 사는 사람의 집 소파에서 며칠 묵는 식의 숙박형태다.

전세계 사람들이 가입하고 있는 카우치서핑 커뮤니티가 있고, 웹과 앱으로 접근할 수 있다. 회원가입을 하고 자기소개를 정성껏 작성했다. 모르는 사람 집에서 자는 것이고, 상대 입장에서도 모르는 사람을 재워주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소개와 사진은 무조건 많을수록 좋다. 서로가 무섭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처음이 가장 어렵다. 카우치서핑 커뮤니티 내에서 내가 재워주거나 나를 재워준 사람들이 쌓이기 시작하면 레퍼런스라고 하는, 그들이 나에 대해 남긴 평가가 쌓인다. 레퍼런스가 수십 개인 사람은 아무래도 믿을 만한 게스트/호스트일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처럼 처음 가입한 사람은 아무 레퍼런스도 없기 때문에 호스트들도 무서울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공짜로 자기 집 소파에서 낯선 사람을 재우려는 사람들은 뭘까? 나도 약간 의아했는데, 대부분은 여행과 새로운 만남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인 것으로 보였다. 자기소개를 읽어보면 자신이 카우치서핑 게스트가 됐던 경험이 좋았기 때문에 호스트도 시작했다는 사람도 있고, 자신은 긴 시간을 내서 여행하기 어려운데 주말에 게스트를 받아 낯선 문화와 접하고 새로운 사람과 대화하는 걸 즐긴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물론, 다소 불순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가령 레퍼런스를 확인하다보면 특정 성별의 게스트만 받아들이는 사람도 많다. 아무래도 위험이 다르기 때문에 호스트는 90% 이상이 남자인 느낌이었다. 게스트는 여성도 많은 편이다. 남자게스트만 받는 남자호스트들도 있는데, 게이인 경우가 상당히 많다. 프로필에 게이라고 직접 써놓은 사람도 많고, 써놓진 않았지만 레퍼런스 목록에서 그런 느낌이 나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굉장히 레퍼런스도 많고 평이 좋아서 심각하게 고려했던 한 호스트는 자신이 게이 커플로 둘이 같이 살고 있으며, 누디스트라서 퇴근하고 집에서는 나체로 있는 걸 즐긴다고 써놓았다.

나는 첫째로 돈이 없었고, 둘째로 호텔에 묵으면서 유명한 건물 앞에서 인증샷만 찍어오는 여행보다는 현지의 문화와 생활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에 카우치서핑에 꼭 도전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처음이라는 점, 낯선 동양인 남자라는 점, 영어가 능통하지는 않다는 점 등이 걸려서 그런지, 무료로 보낼 수 있는 10개의 요청이 다 거절 당하거나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 사이 시간은 흘러 마음이 급해진 나는 그나마 경험이 있는 우프Wwoof 네덜란드에도 가입했다. 우프는 유기농 농사를 짓는 농가에서 묵으면서 하루에 5시간 정도 농사일을 도와주는 대신 숙박과 식사를 제공받는 전세계적인 커뮤니티다. 단, 이 커뮤니티는 나라마다 따로 가입을 해야한다. 난 신혼여행에서 프랑스 우프를 일주일 경험해봤다. 일도 힘든 건 안 시키고 오후와 주말엔 일부러 잘 놀 수 있게 도와주고 구경시켜주기까지 해서 무척 좋았던 기억이 난다. 뿐만 아니라 식당 음식이 아닌 진짜 프랑스 사람들이 가정에서 일상적으로 만들어먹는 리얼프랑스가정요리를 그렇게 다양하게 일주일 내내 맛본 게 너무 좋았다. 직접 농사도 짓는 사람들이다보니 더욱 특별했고 맛도 좋았다. 안되는 영어로 각자의 살아온 이야기와 프랑스와 한국, 남아공(당시 다른 우프 게스트가 한명 같이 있었는데 남아공의 대학교수였다!)의 문화와 기후와 농사와 정치와 환경정책에 이르기까지 온갖 이야기를 나눈 것도 기억에 남았다. 게다가 우린 한국에서 우프 호스트를 하고 있는 사람들도 알고 있었기에, 카우치서핑보단 훨씬 친숙했다.

그러나 우프도 5곳이 넘게 거절당했다. 일단 시기가 안 좋았다. 이곳도 겨울이고 4시면 벌써 해가지기 시작하는 계절이다보니 농사가 끝나는 시기라 대부분의 농장들이 게스트를 받지 않는 시기였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 퍼뜩 청년연대은행 시절 암스테르담에 살면서 조합원으로 활동하던 분이 떠올랐다. 네덜란드에 살면서 한국에 있는 청년단체에 가입해서 돈도 내고 활동도 한다는 게 워낙 인상적이었기에 기억하는 분이다. 심지어 한국에 잠깐 와있는 기간을 이용해 조합 행사에도 한번 참여하셔서 안면도 있었다. 암스테르담에 가게 되었으니 혹시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있으시거나 조언해주실 수 있는 부분 있으면 알려달라고 가볍게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냈다.

처음엔 답장이 빨리 오지 않아서 몇 년 전에 한번 본 게 다인 사이인데 너무 친한 척 메시지를 보냈나 걱정했는데, 이틀 뒤 긴 답장이 왔다. 거기엔 여행기간 중에 아내분이 출장가셔서 방이 비는 기간이 5일 있으니 그동안 거기서 지내셔도 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약 1/3 정도의 숙박이 갑자기 해결됐다. 당장 급한 입국하자마자부터 5일의 기간은 내게 암스테르담에 놀러오라고 했던 친구가 한다리 건너 아는 다른 친구의 집을 소개해줬다. 이게 바로 최종확인이 출국 당일날 새벽에 되었던 그 호스트다. 결국 카우치서핑이고 우프고 다 실패하고 암스테르담에 사는 두 분의 한국인들의 호의에 기대어 떠나는구나 싶어 고마우면서도 미안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만나서 같이 지내고 있는 내 첫 호스트는 Daan. 네덜란드어 발음으로는 '단'에 가깝다. 돈을 받고 재워주는 거지만, 혼자 쓰는 방을 빌려주는데 14인실의 침대 하나 빌려주는 호스텔정도의 가격이다. 단은 일곱 살 귀여운 강아지 '스눗'을 키우는 40대 직장인이다. 그의 아낌없는 환대와 넘치는 친절에 따뜻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다. 어찌보면 돈도, 대책도 없었던 덕분에 말도 안되는 호의와 친절을 얻은 기분이다. 돈은 좀 더 벌고 싶지만, 그가 요리해주는 네덜란드 전통 음식을 먹으면서 실컷 수다를 떨고 있으니 혼자 호텔과 레스토랑에 가서 무슨 재미였겠나 싶다. 덤으로 뒤늦게 웬 카우치서핑 호스트가 연락을 해왔다. 내가 요청을 보낸 호스트가 아니라, 내가 적어둔 여행일정을 보고서 자기 집에 묵으러 오겠냐고 역으로 요청을 보내온 것이다. 암스테르담에 살지도 않고 근교도시에 사는 사람이다. 좋은 사람 같고, 흥미롭지만 거기에 가봐야할지 아직은 고민 중이다. 아직도 여행 끝의 5일의 숙소는 정해지지 않았다. 길지도 않은 이 여행동안 어떤 Dutch들을 더 보고 겪게 될지 몹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