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라는 만남

어떤 친절 - 암스테르담2

참참. 2020. 2. 9. 08:21

어떤 친절

새벽 다섯 시에 잠이 깨서 별 생각없이 페이스북을 켰다. 메시지가 한 통 와있었다. 신세지고 있는 집의 주인분께서 보낸 메시지였다. 메시지는 꽤 길었다. 요점은 본인이 바쁘고 여유가 없는 시기라 살뜰히 챙겨드리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씀이었다. 메시지에는 암스테르담에서 추천하는 박물관, 음식점, 카페 등의 정보도 잔뜩 담겨있었는데, 구글맵에서 쉽게 검색할 수 있도록 건물과 지역 이름을 네덜란드어 스펠링까지 적어주셨다.

처음 이 집에 올 때, 직장 끝나고 학교까지 갔다오면 밤 10시가 넘으니 늦게 와달라하셨다. 피곤하실텐데도 헤매다 11시도 넘어 도착한 내게 이런 것밖에 없다며 무알콜 하이네켄을 건네셨다. 자유롭게 왔다갔다 할 수 있도록 별도의 열쇠를 주셨고, 장은 어디서 보면 되는지 근처에 좋은 장소들은 어디가 있는지 얘기해주셨다. 거실엔 따뜻한 노란 조명 아래에 깔끔한 테이블과 아늑해보이는 녹색소파가 놓여있고, 창문으로는 물 위를 떠다니는 배와 야경이 멋지게 내려다보였다. 손님방이 따로 있고 거기엔 깨끗한 이불이 깔린 2층 침대가 갖추어져 있었다. 

손님방이 따로 있는 걸 보고 손님이 자주 오시냐고 물어봤더니 암스테르담으로 이사온 것은 아직 몇 달 되지 않아서, 이 집에는 아직 손님이 다녀간 적이 없다고 했다. 몇 년동안 네덜란드에 살고 계시는 분이었는데, 그동안 다녀갔던 손님들이 쓰고 간 방명록도 있었다. 나도 나중에 가기 전에 쓰고 가면 된다고 했다. 들춰봤더니 하나같이 좋은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 느껴지는, 진심이 담긴 감사메시지로 가득했다.

페이스북 메시지를 읽으면서 방명록에서 읽었던 손님들의 마음이 겹쳐보였다. 사실 난 주인분과 친하지 않았다. 몇년 전 그가 내가 일하던 청년단체에 온라인으로 가입을 하고 후원을 했기 때문에 알게 됐을 뿐이다. 한국 방문기간에 단체의 행사에 놀러오셔서 딱 한번 얼굴 뵈었다. 그 뒤로 3년동안 제대로 연락 한번 한 적 없다. 어쩌면 나야말로 지금까지 방명록에 글을 남겼던 그 누구보다도 개인적인 관계가 적은 사람 아닐까?

집에 손님을 들인다는 게 얼마나 불편하고 신경 쓰이는 일인지 여러번 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보통은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자주 오면 귀찮고 싫어지게 마련이다. 하물며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 내가 이 사람에게 대체 무엇을 해줬나 생각해봤다. 당연히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같은 학교를 다녔다든가 뭐 그런 연조차 없다.

별 상관도 없는 내게 이렇게나 많은 것을 주고도 더 잘 챙기지 못해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읽고 있자니 어쩐지 경건한 기분이 됐다.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호의와 친절을 받은 나머지, 종교도 믿지 않는 내가 신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 지구에 함께 살고 있는 다른 많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내가 받은 이것들을 이 사람에게만은 다 갚을 수가 없으니 나 역시 내가 앞으로 마주칠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야한다는, 잊고 있던 마음도 슬쩍 고개를 들었다. 오늘밤엔 이 마음을 너무 빨리 잊지 않길 기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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