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라는 책읽기

『반란의 영문법』, 이장원, 지식과감성

참참. 2019. 6. 3. 09:14

반란의 영문법과 우리집 고양이 배추(공부하다 힘들면 얘 팔자 부러움). '고양이어문법'도 있으면 좋겠다.

여차저차하다보니 대학교 2학년 교양수업 이후로 한 8년은 손댄 적 없던 영어를 공부하게 됐다. 그러던 와중에, 시험공부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흥미로운 영문법 팟캐스트를 알게 됐는데, 바로 '반란의 영문법'이었다. 그 뒤로 밥 먹을 때나 이동할 때 틈날 때마다 들었다. 팟캐스트에는 아직 관계대명사나 가정법에 대한 내용이 없어서 질문 이메일을 보내면서 책이 나와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이메일 답변도 굉장히 친절하게 해주셨다.)

영어를 잘 못하면서도 기존에 배운 영문법의 설명방식이 늘 맘에 안 든다고 느꼈던 터라 장원샘의 설명이 너무 좋았고(그렇다고 갑자기 영어를 잘하게 될 순 없지만), 책도 살 수밖에 없었다. 준비하는 독학사 시험에도 상당히 도움을 받았고(2단계), 받고 있다(3단계). 지금 학점은행제도로 영어영문학 학사학위를 따고자 사이버 평생교육원 온라인 강의와 독학사시험도 병행하고 있는데, 영어학개론이나 영어통사론 등 현대영문법을 직접 다루는 과목은 물론이고, 영문법(2단계)과 고급영문법(3단계)과 같은 일반적 문법과목에도 당연히 반란의 영문법이 도움이 된다.

한국식 영어교육이 엉망진창이고, 문제가 많다는 생각은 15년 전에도 했었고 학교 다녀본 사람들은 대부분 공감할 일이지만, 또 막상 이렇게 하나하나 조목조목 따져주시는 걸 들으니 내가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관이었다. 거 참 씁쓸하다. 학교에서 엉터리지식, 가짜지식을 외우게 하고 시험을 보고 있다니, 어휴! 완전히 가짜지식이라고 할만한 것은 물론 극히 일부긴 하지만, 비실용적이고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데 도움이 안 되는 방식의 문법교육도 모자라서 가짜지식까지 포함되어있다는 게 너무 놀랍고 안타깝다. 과학을 가르치면서도 "이걸 이렇게 배울 게 아닌데, 과학은 재밌는 건데, 사실 과학자란 사람들은 그냥 자연이, 우주가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궁금해서 덕후처럼 파고들어본 것뿐인데 결과만 외우게 가르치다니, 지식보다 중요한 건 거기까지 도달하게 만든 호기심이고, 보이는 것을 넘어서 과학적으로 사고하고 탐구하고 비판하는 방법과 태도일텐데." 등등 이런 생각을 많이 하는데, 이걸 듣다보니 최소한 영어교육보단 나은가싶기도 하다. 해당 과목에 대한 호기심과 흥미를 일으키기보다는 '그건 어렵고 억지로 해야하고 싫은 것'이란 느낌만 남기는 건 우리 교육의 전과목 공통사항인데, 적어도 과학교육에서는 단순화된 지식은 있어도 명백한 가짜지식은 생기기 어렵다는 점에서 말이다.

게다가 장원샘이 말씀하시는 영문법에 관한 내용이 과학과 비슷한 게 많았다. 문법이란 것도 결국엔 학자들이 영어엔(나아가 '언어'엔) 어떤 규칙이 있을까 궁금해서 분석하고 연구해본 것뿐이지, "이렇게 써야한다"는 규칙이나 지켜야하는 법률같은 게 아니라니(그런 건 옛날식 '규범'문법)! 미국, 영국엔 '국립국어원'같은 것도 국가 공인 '맞춤법규정'같은 것도 없어서 어떻게 말해도 '그게 틀렸다!'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근거도 없다니! 알고 보면 당연하게도 느껴지지만, 학교에서 문법교육 받으면서 맨날 틀린 거 고르라는 문제 풀고, 엄연히 맞춤법과 표준어 규정이 존재하는 한국에 살아온 나로서는 문화충격이었다. 장원샘의 명언이 심금을 울린다. "문법의 본질은 그 자유로움에 있다."

영어교육의 목표가 대체 무엇인가에 강렬한 의문이 있다. 대부분 그럴 것이다. 이 의문은 "한국에서 학교다니면서 10년 이상 영어를 배우고 심지어 수능에서 1, 2등급 맞아도 외국인 만나면 말 한마디 못한다"는 한 줄로 요약되는 의문이다. 나 역시 10년 전 모의고사, 수능 영어에서 나름 평균 2등급에 종종 1등급도 받아봤던 기억이 있지만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데는 지장이 매우 많았고 지금도 손짓발짓 다 동원해서 아주 단순한 수준의 소통밖에 안 된다. 영어원서로 된 가벼운 책 한 권 끝까지 읽어본 적도 없고, 궁금한 게 있을 때 한국어검색결과가 없으면 구글, 유튜브에서 영어로 검색해서 영어로 된 자료를 찾아본다는 행위에도 굉장한 저항감과 피로감이 있다. 실제로 그렇게 해서(영어 웹검색) 자료를 찾아본 경험도 한 손에 꼽을 정도다. 영어교육의 목표가 말하기듣기, 즉 '회화'에 있느냐 아니면 읽기쓰기(글을 독해하고 논문을 읽고 쓰는 학술적 필요)에 있느냐에 따라 디테일한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지금의 영어교육이 학생들이 들인 시간과 노력에 비해 어느쪽이든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것만은 부정하기 어려울 듯하다.

즉, 우리가 배우는 영문법과 그를 통한 시험문제풀이가 실제 영어를 말하고 듣고 읽고 쓰는 능력을 기르는 것과 괴리가 크다는 것이다. 보통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회화 교육, 문법보다는 원어민이나 원어민의 영어컨텐츠에 계속 노출시키는 것 등이 제시되는데, 그것도 맞지만 보통 그러면서 영문법 교육은 쓸데없다고 치부된다. 하지만 사실은 '지금의 한국영문법 교육'이 그런거지, 진짜로 '영문법'자체가 회화나 독해에 쓸모가 없진 않다. 문법을 몰라도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데 지장이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문법을 알면 더 수월하게 영어를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수영을 하거나 요리를 해도, 수영 이론이나 요리 이론만 열심히 외운다고 수영이나 요리를 잘하게 되는 건 당연히 아니지만, 그렇다고 수영 이론이나 요리 이론이 필요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무작정 물에 빠뜨리고 수영을 하라고 하면 그렇게도 배울 수는 있겠지만, 그보다는 방법을 알려주고 차근차근 해보고, 다시 또 익히는 정도에 따라 올바른 이론으로 교정해주고 다시 그걸 연습하고 보통 이런 식으로 배우는 게 가장 좋다. 요리 역시도 무작정 엄마가 하는 거 따라서 밥 해보고 반찬 해보고 하면서 배워도 문제는 없지만 굉장히 오랜 시간과 노력, 시행착오가 필요하다. 단기간에 익히고 싶다면 연습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정리해놓은 레시피를 참고해서 이럴 땐 이런 재료를 쓰고 어떤 조미료를 얼마 정도 넣으면 적당하고 어떤 것과 어떤 것은 서로 어울리거나 어울리지 않는 식재료라는 걸 아는 게 도움이 안 될 리가 없다.

영문법이란 것도 현대에 더 널리 인정받는 영문법, 영어권 사람들이 인정하는 방식의 좀 더 나은 영문법, 가짜지식이나 시험에서 답을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닌 의사소통에 도움을 주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영문법이라면 수영에서의 이론이나 요리에서의 이론처럼 훨씬 더 도움이 될 수 있다. 그것만 공부해서 영어를 잘할 순 없지만 영어를 읽고 쓰고 말하고 들어보는 경험과 함께 그걸 보조하는 도구로서의 쓸모는 충분하다. 애초에 수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영어를 분석하고 연구해서 규칙을 찾아놓은 게 영문법이니까 말이다.

이 책과 팟캐스트(http://www.podbbang.com/ch/15357)에서 장원샘이 하고 계신 말씀과, 내 평소 생각이 섞였는데, 대략 위와 같은 관점에서 쓴 현대적 영문법책이라는 느낌이다. 책의 공식 소개글에도 있지만 보통 영문법 책 처음에 나오는 '문장5형식'부터 그 허구성을 지적하고 파괴(?)하면서 시작되는 혁명적인 책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는 영어가 무슨 다른 영어가 되는 건 아니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분석(?)했던 문장들을 다른 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리고 그 수많은 '법칙, 원칙'과 그보다 더 많은 진짜 진절머리나는 '예외'들을 그런 식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일단 '원칙'과 '예외'라는 건 거의 없다는 게 통쾌하다. 법칙이면 법칙이지 뭔 예외가 이렇게 많아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그런 애도 있고 이런 애도 있는데 그런 애가 좀 더 많은 것뿐이다. 이렇게 배운다고 갑자기 영어가 쉬워지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논리가 아닌 논리를 외우려다 멘탈이 붕괴됐던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몹시 반가운 설명이다.

사이다같은 반란의 명언들을 소개하면서 책 소개를 마칠까한다.(덧붙이자면, 775페이지짜리 책이고 본격 영문법 공부서적이며 가볍게 읽을 만한 책이라기보단 제대로 공부를 하거나 혹은 필요할 때 사전처럼 참고할 수 있는 책이다. 아예 영어를 처음 배우는 사람보다는 어느 정도 중급자용 책이다. 나도 아직 얼마 못 읽었다.)

영문법이 어렵고 지겹다고 하는 것도 사실은 시험문제가 어렵고 시험공부가 지겹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 14쪽

문법은 특정 방식으로 표현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틀리다고 강요하는 억압적 규칙이 결단코 아니며 그런 규칙의 강요로는 결코 영어를 구사하도록 이끌 수 없다. - 15쪽

"많이 배운 사람이 하는 말이고 책에 쓰여 있는 말인데 틀릴 리가 있겠어?"하며 이해가 안 가는 설명을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고 생각을 억지로 끼워 맞추지 말라. 여러분의 이해력이 낮아서 이해가 안 가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저들이 말도 안 되는 설명을 늘어놓는 것일 수도 있다. - 16쪽

혹자는 5형식 없는 영문법이 낯설고 검증되지 않은 특이한 설명이라고 말하기도 하나, 영어권에서는 5형식 개념이 폐기된 것조차 아니며 아예 애초에 채택된 적도 없다. 한국과 일본 이외의 전 세계가 5형식 없는 영문법을 배우고 있는데 무슨 검증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전 세계의 ~ 현실을 고려하면 검증이 필요한 것은 오히려 5형식 개념일 것이다. - 17쪽

한국식 영문법 교육에는 "관계대명사 뒤에는 '불완전한 문장'이 오고 관계부사 및 '전치사 + 관계대명사' 뒤에는 '완전한 문장'이 온다"는 설명이 만연해 있다. 이것은 입시문화가 만들어낸 기괴한 가짜 지식 중 하나이다. 한국에서 이런 방식으로 가르친다는 것을 외국의 교육자들이 알게 되는 것을 상상만 해도 부끄러워서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다. - 577쪽

일본식 영문법의 가정법에 대한 설명은 역사에 길이 빛날 희대의 학술적 코미디이자 일본식 영문법이 이룩해 낸 엉터리 설명 체계의 끝판왕이다. 가정법에 관한 시험문제들이 대부분 정형화되어 있다 보니 그에 대비한 문제풀이 요령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러한 요령이 문법적 지식인 듯이 포장되어 가르쳐지는 것은 통탄할 일이다. 일본식 영문법으로 가정법을 가르치고 배운 세대는 정보화 사회와 글로벌 시대를 자처하는 21세기까지도 그런 조잡한 헛소리를 진지하게 가르치고 배워온 것에 대해 후대 사람들의 비웃음을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 584쪽

추신: 장원샘은 비교적 가볍게 읽을 수 있는 한국영어교육비판 에세이 책을 따로 한 권 내셔도 좋을 것 같다. 이 책에서 본격 문법사항과 예문들 걷어내고 예시를 포함한 에세이 형태의 글로 다듬고 칼럼처럼 몇 편 새로 쓰셔서 합치면 괜찮은 에세이 책도 한 편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진짜 본격적으로 현대영문법 공부는 안 할 거지만 지금 영어교육의 문제점을 알리고 사이다처럼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만으로도 수요가 있을 듯하고, 그 책을 읽고 더 관심이 생기면 반란의 영문법 책 구입까지 이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ㅎㅎ)

추신2: 이 책이 세상에 등장하게 된 배경엔 매우 재미있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데, 그의 뮤즈 에이핑크의 Marcella의 비밀(?)을 알고 싶으신 분은 팟캐스트 57화를 들으시면 된다. 성덕(성공한 덕후)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여러분 팬심이 이렇게 세상에 이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