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라는 글쓰기/귀농귀촌 이야기

작은책 17.12월) 청첩장처럼 찾아온 서리

참참. 2018. 3. 6. 11:16

청첩장처럼 찾아온 서리

자연농 배우는 참참

 

축복할 결혼이 많은 가을이었다주말마다 서울이며 강화도며 부지런히 돌아다녔다그러느라 시월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몰랐다.그러던 어느 날연애를 오래 한 친구의 청첩장처럼 된서리가 왔다오겠거니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 날이 오니 아무래도 좀 놀라게 된다.

해마다 서리를 보아왔을 텐데 그런 적이 있었나싶을 만큼 낯선 느낌이었다넓은 밭에 배추 조금 빼고는 참말 남김없이 쓰러졌다.그토록 줄기 굵고 잎 넓던 토란도 거무죽죽해져서는 맥없이 축 처져있었다다들 맛있다던 토란대는 결국 맛을 못 보게 됐다짝꿍과 부랴부랴 토란을 캐고 무르지 않은 토마토들을 초록색 녀석들까지 다 땄다큰 동아박 세 개와 씨를 받기 위해 남겨두었던 오이들도 거두었다고라니가 잎을 다 먹어 결실이 없던 메주콩도 조금은 살아남았다벌써 꼬투리가 절로 터져 콩알이 땅에 흩어져있는 걸 조금 주웠다강황과 야콘은 그러고도 일주일은 더 지나서 캤다.

농사라고 얼마 짓지도 않았건만 나름 가을걷이를 하고보니 이젠 보관이 큰일이다거두어 그대로 보관하면 쉬우련만 말려야하는 건 뭐가 그리 많은지물기가 있으면 아무래도 상하기 마련인가 보다고추고구마땅콩토란들깨까지 다 말리려니 우선 말릴 데가 없다시골집에 으레 딸려있는 마당의 쓰임새를 이제야 깨닫는다해가 떨어지면 금방 추워지고 이슬과 서리가 내리니 아침저녁으로 널었다가 들여놓았다가하는 일도 손이 여간 많이 가는 게 아니다아무리 부지런을 떨어도 날씨까지 도와주지 않으면 헛일되기 쉽다고추같은 건 이제 햇볕에 말리는 사람이 거의 없다다들 건조기 쓴다우리 고추도 개구리소금쟁이님 댁에 꼽사리 끼어 건조기 덕 좀 봤다.

그렇게 말리기까지 했는데 둘 데도 마땅찮다그 전까진 왜 그렇게들 저장고를 짓나 했다우리 집 작은 냉장고에는 다 넣을 수 없는 토란과 동아박 등을 다 어찌할 줄 모르고 있다너무 따뜻해도너무 추워도 안 된다집 안은 우리에겐 추워도 곰팡이에겐 딱 좋다동아박을 집 안에 두었다가 사흘 만에 바닥과 닿은 쪽에 곰팡이가 잔뜩 피었다토란은 책에 나오는 대로 밭 한쪽을 파 거기에 볏짚을 깔고 묻어두었는데그 얘길 듣는 분마다 여기는 다 얼어버려서 안 된다고 손사래를 치셨다깨갱더 추워지기 전에 토란 다시 파내러 가야한다옛날 사람들이 묵나물이며 김치며 장아찌같이 겨울에 보관하면서 먹을 수 있는 온갖 방법을 알아내지 않았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결국엔 개구리소금쟁이님 댁 저장고에도 신세를 좀 지고코드 빼놓고 선반으로 쓰던 원룸에 딸린 작은 냉장고도 켰다원룸 앞 복도에 그냥 놓아둔 것들도 있다그밖에도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있다짝꿍은 지푸라기 가져와서 새끼줄을 꼬더니 동아박을 껍질 벗겨 자른 뒤에 그 새끼줄에 줄줄이 끼워 매달아놓았다이름은 동아박고지 정도 되려나옛날에 할머니가 처마 밑에 곶감 매달아 말리던 게 떠오른다.

논에서 벼도 거두었는데 모래무지님이 작년의 십 분의 일도 안 된다고 하실 만큼 수확량이 적었다모내기 도와준 친구들도 조금씩이라도 맛보여주고 싶었는데 어림도 없을 정도다신경을 많이 못 쓴 탓이라곤 하지만 너무 이상해서 왜 그런가했는데알고 보니 멧돼지가 먹은 거였다멧돼지가 쌀을 좋아하는 줄은 처음 알았다산에 멧돼지를 먹는 포식자도 없고사람들이 도토리 같이 산에 있는 그들의 먹을 것을 다 뺏어오는 것도 문제다사람은 사람대로 먹을 것을 지켜야하니 우리도 머리를 맞대고 있지만 쉽지 않다.개구리님은 볏덕(건조대)에 걸어 말리고 있는 벼를 지키신다고 논에 텐트를 치고 주무시기까지 했다.

요즘 일거리 중 또 하나는 김장품앗이다동네 사람들이 김장 날짜를 서로 알고 다 모여서 김장을 한다날짜가 겹치면 안 된다짝꿍이 일하는 학교 청소하시는 분 김장하는 날 우리도 처음으로 도우러 갔다동네 아주머니할머니 분들이 다 오셨다그동안 오며가며 지나치기만 하다 인사 제대로 드렸다이 마을에선 김장을 하면 집주인이 솥에다 수육을 삶아 그날 담근 김치와 함께 도와준 이웃들에게 대접하나보다그날도 그랬다우리는 농사도 작게 짓고 김장도 크게 할 수 없는 걸 아셔서인지큰 통에 김치까지 잔뜩 담아주셨다정말 고맙게 받았지만 그것도 넣어둘 데가 없어서 맛도 못 보고 다른 집 저장고 신세지고 있다.

개구리소금쟁이님 댁 김장은 나 혼자 가서 도왔다배추 좀 나르다 밥이나 얻어먹으면 되는 나와는 달리 주인댁은 미리 배추 절이고 김장양념도 준비하고 손님 접대까지 해야 한다. 곁에서 보고 겪어보니 역시 김장보통일은 아니다우리도 밭에 배추와 무를 심어놨는데 다 조그맣다동네 분들은 그걸로 무슨 김장을 하냐며 웃으시지만 그래도 조그맣게나마 커준 녀석들로 김장 해보련다.우리 고추 말려놓은 것 믹서에 갈아서 고춧가루도 쓸 거다양념재료는 많이 물어도 보고구하기 어려운 건 좀 빼고 해야 할 듯싶다.잔뜩 해서 여기저기 나눠주는 꿈도 꾸어봤는데 우리 깜냥으로는 아직 무리다.

먹을 궁리도 한 재미다땅콩은 햇볕에 잘 말리면 날것으로 먹을 수 있다특히 토종땅콩은 크기는 작지만 비리지 않고 어찌나 맛있는지 모른다진짜 심심풀이 땅콩이라 옆에 두고 하나씩 까먹는 재미가 쏠쏠하다덜 익은 토마토는 어떡할까미국에서는 그걸 튀겨먹는단다후라이드 그린 토마토다장아찌피클로 담그면 좋다는 얘기도 많다짝꿍은 잼을 만들었다설탕의 종류와 양얼마나 졸여야할지 등 실험 중이다잼 전에는 처음으로 막걸리를 만들었는데 시간이 촉박해서 추수 도우러 온 손님들에게 모르고 덜 발효된 막걸리를 대접했다그래도 맛있다고 몇 잔이나 마신 분도 있었는데 그게 뱃속에서 발효가 되면서 밤새 배에 가스가 찼단다그날 손님 여섯 분이 개구리님 사랑방에 묵었다는데난 그 방에서 안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