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라는 책읽기/마음이 머무는 구절

10년만에 다시 한번 『앨저넌에게 꽃을』을 읽고

참참. 2017. 8. 16. 20:20

2013/05/09 - [내가 바라는 책읽기/고교시절 책읽기(~2008)] - <앨저넌에게 꽃을>, 대니얼 키스


10년 전에 읽었던 소설 『앨저넌에게 꽃을』. 당시에 큰 감동을 받고 블로그(당시엔 네이버블로그)에 짧은 리뷰(위 링크)도 썼었는데, 이번에 다른 출판사에서 정식으로 다시 번역되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너무 오래 지나서 어떤 내용이었는지 어렴풋한 기억밖에 남아있지 않아 이전 번역본과의 비교는 어렵지만, 여하튼 황금부엉이 출판사에서 나온 새 번역본으로 다시 한번 읽어보게 됐다.

고등학생이던 나와 20대 후반이 된 나는 다른 사람이라고 봐야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더 구체적으로 해보게 됐다. 스포일러가 될까 조심스럽지만 소설의 내용을 좀 이야기해보자면, 주인공 찰리의 일기와도 같은 경과보고서 속에서 우리는 그가 이전과는 참 많이 다른 존재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자신이 겪었던 일을 다시 기억하고,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과정, 그 과정은 때로는 우리에게 아픔을 주기도 하지만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기도 한다.

이 이야기 속에서 찰리가 겪는 것과 우리가 일상의 시간을 살면서 겪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을만큼 다르다. 속도와 강도, 그 해석의 간극이라는 모든 측면에서. 그러나 그렇게 극단적인 변화를 통해서 오히려 그렇게 극적이지는 않은 나의 변화를 본다. 내가 과거에 겪었던 일들을 그 당시에 받아들이고 해석했던 방식과 지금 그것을 기억할 때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들을. 기억이란 건 결코 객관적이지가 않다는 걸 새삼 또 생각한다. 내가 기억하는 나, 나는 누구인가. 그런 질문들을 끝도 없이 돌이켜봤다.

아직은 새파랗게 젊지만, 늙는다는 것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좀 다른 얘기지만 예전에 만약 어떤 사고로 신체의 일부를 쓰지 못하게 된다면 가장 무서운 건 시각, 눈을 잃는 게 아닐까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치매가 가장 무섭다. 시각이든 청각이든 팔다리든, 그걸 잃어도 나는 여전히 '나'라고 내 인격은 연속적이라고 느낄 수 있겠지만, 그게 무너지는 것이 바로 치매라는 생각을 한다. 누군가는 치매를 두고 생물학적으로는 살아있지만 인격은 이미 죽는 것이라고도 한다. 내가 누군지, 내게 소중했던 사람들이 누군지, 내가 하고싶은 일은 뭐고 난 뭘 사랑하는지를 잊는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하다.

그런 상황이 닥쳐온다면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대처해야할까? 평균수명이 이렇게나 길어진 지금, 그런 일을 겪을 확률은 결코 낮지 않다. 굳이 미래의 일을 앞당겨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내가 아니라 우리 부모님이 그럴 수도 있고 우리 할머니는 지금 실제로 치매증세가 꽤 진행된 상태다. 나는 그저 가끔 할머니를 뵈면 할머니가 묻는 반복되는 질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 대답해드리는 정도밖에 해드리는 게 없다. 아마 지금까지 군대 갔다 왔냐는 질문을 100번은 족히 넘게 받았던 것 같다. 할머니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것도 아닌데 똑같은 질문을 계속 하지 말라는 짜증을 부려서 할머닐 위축시키고 싶진 않다. 자신이 그 질문을 했었는지 기억을 못하는데 그 말을 들으면 당연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내가 이미 했던 말일까봐.

물론 일상적으로 할머니를 모시지 않고 1년에 몇번 뵙는 나니까 이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24시간 할머니를 돌봐야한다면 나도 그런 일 해낼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다. 앨저넌에게 꽃을 놓아달라고 부탁하던 찰리는, 워렌 주립보호소를 둘러보던 찰리는, 가족들을 만나던 찰리는, 정말로 그런 상황에 내가 놓이게 된다면 어떤 마음이 될까. 지금은 가능하지 않은 일을 상상하지만, 그 상상력으로 지금 우리의 삶을 다시 보게 만드는 것, 내가 좋아하는 SF(과학소설)의 매력을 한껏 느껴볼 수 있는 작품. 10년이라는 삶을 더 겪었고 다른 많은 과학소설도 읽어본 지금 다시 읽은 『앨저넌에게 꽃을』은 그런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