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감의 기억이 아직 많이 남아있을 때 허지원 선생님께서 쓰신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를 빌렸다. 도서관에 반납해야하는 날짜가 이젠 정말 얼마 남지 않아서 뒷부분을 마저 읽고 있는데, 책 진짜 좋다.
'우울이 우리의 어깨를 붙잡고 아래로 내리 누르기 시작하면, 단순하거나 중립적인 사건들에도 회의감은 고개를 쳐들고, 우리는 자꾸만 '왜?'를 고민하게 됩니다.
"내가 왜 살아야하지?"
"왜 죽으면 안 되지?"
(중략)
'왜?'가 어디 있어요. 그냥 하는 겁니다.
다들 되게 생각 있어 보이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삶에 뭔가 큰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믿음은 누군가의 삶에 도움이 되는 기능적 요소라기보다는 상처 입고 고단했던 자기애가 남긴 하나의 증상같은 것입니다.
삶에 큰 의미가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의미이고, 그것만으로 당신은 다 한겁니다. 살아있는 부모, 살아있는 친구, 살아있는 자식, 살아있는 나, 그거면 됐습니다.'(의미를 찾으려 하지 말 것, 172쪽)
신기하게도, 나도 그렇게 '왜?'를 오랫동안 고민하고 있었는데, 우울을 덜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고민도 덜 하게 됐다. 그런 고민을 덜 하게 되면서 덜 우울해지기도 했다.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뚜렷하게 알 수 없지만 그게 참 신기하다.
'돈을 쓰는 것도 좋지요.
실제로 농반 진반으로, 학생들에게도 내담자에게도 "돈이 최곱니다. 여러분!" 하며 여러 설득을 합니다. 돈이 있다면 우리는,
구멍이 난 스타킹이나 솔기가 뜯어진 슬리퍼를 기꺼이 버릴 수 있고,
커튼의 디자인을 바꿀 수도 있을 것이고,
커피에도 여러 맛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내 취향에 맞는 맥주와 아이스크림을 알게 될 것이고,
내 발에 정말 편한 신발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우리는 조금 더 멀리 갈 수 있으니까요.'(172쪽)
뜬금없이 돈이 최고라니 재밌는 말이라서 웃음도 나오지만, 돈이 없다는 생각과 무력감이 우울과 만나면 시너지가 장난 아니다. 사실 그리 많은 돈이 필요한 건 아닌데, 취향에 맞는 아이스크림, 그 정도로도 훨씬 내 기분을 괜찮게 만들 수 있는데! ㅎㅎ 저 아래 나열된 일들을 하나하나 음미해보면 내 둘레에 얼마나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작은 요소들이 많은지 새삼 느끼게 된다.
'왜?' 보단 '어떻게?' 가 맞는 질문이라는 말씀이 어떤 상황에서 써야하는 말인지 정말 알겠다. 자꾸만 '왜'만 떠오르던 시절을 겪어봐서 와닿는다. 그러고보면 요즘은 확실히 '어떻게?'라는 고민을 훨씬 자주 하는 것 같다. 특히 내일이 프로그래머로서의 첫 출근이라 어떻게 프로그래밍을 잘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회사생활을 잘 시작할 수 있을지가 제일 고민이다. 그게 고민이라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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