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라는 책읽기/바라는 삶을 사는 이들

강성미, 『가족의 시간』 그 가족의 삶을 함께 느끼다

참참. 2017. 7. 30. 13:59

첫 책 내 아이가 사랑한 학교를 내실 때 샨티출판사에서 잠시 신세를 지고 있었던 덕에 인연을 맺게 된 강성미 선생님께서 두 번째 책을 내신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부탁하셨다며, 출판사에서 책이 나오자마자 집으로 보내주셨다. 그렇게 이번에 함께 출간된 가족의 시간, 나는 몇 살의 영혼인가두 권의 책을 받게 됐다. 나는 몇 살의 영혼인가는 선생님의 시집이다. 시집도 따로 내셨지만, 가족의 시간』도 시적이다. 발도르프 교육에 집중한 지난 책도 참 좋았는데 이건 이것대로 참 좋다.

프롤로그를 펼쳐드니 벌써 감동이다.





아이들이 있는 삶에 적응하려던 노력만큼

아이들이 떠난 삶에 적응해야 하는 시간이 왔다.

(중략)

떠나보내는 게 무조건 더 힘든 일이다.

 

잘 보내야지,

멋지게 보내야지,

다시 찾아온 자유를 잘 써서

아이들이 걱정하지 않는 부모가 돼야지,(후략)”

 

돌아보는 것에는

목적도 방향도 없는 것이라

이 글은 그냥 내놓는 글이다

 

자랑도 아니고

교훈도 아닌

가족이 보낸 시간의 그림들이다.”

그러면서도 발도르프학교에 다니는 아이의 학교 일상을 담은 내 아이가 사랑한 학교를 보고 많은 학부모들이 던졌던 질문, “집에서는 어떻게 지내나요?”에 대한 대답으로, 또 우리 가족의 이야기지만 모두의 이야기일 수도 있는 이야기를 같이 나누고 서로의 마음을 다독이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내놓으신 책이다.

(한편으로는, 모르긴 몰라도 둘째딸인 민성님을 좀 더 보여주고자 한 부분도 있으셨을 것 같다. 첫 번째 책에서는 책 주제와 특성상 어쩔 수 없이 첫째 민주님만 등장해서 당시 어렸던 민성님이 좀 서운했을 지도 모른다. 표지를 보면 첫 책에서 민주님 사진이 들어가 있던 그 자리에 민성님 사진이 딱 박혀있는 게 재밌다. 책 안에도 민성님이 어렸을 때의 무척 귀여운 사진이 잔뜩 있다.)

사진 얘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워낙 옛날 사진도 있고,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들로 작업을 하다보니 아무래도 인쇄물에서 화질이 약간 떨어지는 사진이 몇몇 있다. 워낙 고화질의 시대라 아쉬운 부분이지만 가족의 정겨운 모습을 느끼는데 지장은 없었다.

 

집에서 지낸 이야기인데 직접 그림 그리고 요리하고 꿰매는 등 손으로 뭘 만드는 일이 참 많아 보인다. 어린데 재봉틀까지 쓴다. 재봉틀은커녕, 구멍 난 양말 하나 꿰매는 것도 자신이 없어서 미루고만 있는 나와 참 비교가 된다. 우리 세대에서는 직업으로 하는 사람에게밖에는 전달되지 않게 된 지식과 능력들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한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악기를 연주하고 작물을 키우고 요리를 하고 옷을 만들거나 수선하고 된장, 고추장, 김치도 담그고 노래도 하고 춤도 추면서 살면 좋은데, 왠지 무지 어렵게 느껴진다. 그림도, 글도, 음악도, 음식도, 옷도 전문적으로 배웠다는 사람, 잘하는 사람, 업으로 하는 사람에게만 맡기고 우린 그걸 소비한다.

나 역시도 그렇게 배워왔다. 뭐만 할라치면 할머니나 사회적인 시선이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든 책상에 앉아 편히 돈 벌고 이 고생하지 마라.’, ‘그냥 새로 하나 사, 그게 더 싸, 구질구질하게 그러지 말고.’, ‘그거 만들 시간에 알바를 하면 그거 사고 돈 남겠다.’ . 우리 할머니가 매년 했던 김장이며 곶감 만들기며 이런 것들을 나는 책 보고 인터넷 검색해가며 배워도 잘 못한다. 전문가가 아니라도 삶의 많은 부분을 직접 해낼 수 있다는 것의 가치를 점점 더 크게 느낀다. 게다가 그것들은 귀찮고 힘든일이기만 한 게 전혀 아니고 내 능력을 한껏 발휘하는 즐거움과 자기유능감, 성취감을 주고 자연스럽게 창의력이 생기는 일이기도 하다. 자원활용이나 에너지 면에서 무척 효율적이고 심지어 어떨 때는 공산품보다 품질도 더 좋은 맞춤형 물건들이 만들어지기까지 한다. 그런 즐거움과 가능성을 처음부터 닫고 시작한다는 게 참 아쉽게 느껴지는데 이 집은 그렇지 않았다.

빨리 한다고 대충했다며 노트를 다시 쓰고, 뜨개질로 이불을 반에서 제일 크게 떴다며 자랑하고, 빵을 구우면서 힐링하고, 누군가에게 맛있는 걸해서 먹인다는 것의 기쁨을 느끼고, 오랜 세월 함께 산 노쇠하고 병든 강아지를 지극정성으로 돌보고, 꽃밭을 가꾸는 모습들이 참 아름답다. 그냥 보기에만 예뻐 보이는 게 아니라 그런 일상에서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고서야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이 있기나 한가? 뭔가를 사기 위해 싫은 일을 하며 돈을 버는 것도, 그 돈으로 물건을 사는 것도, 그렇게 해서 그걸 직접 만드는 것보다 시간을 아꼈다고 생각하며 그 시간으로 다른 것을 더 소비하는 것도, 생각만큼 행복하지 않다는 걸 우린 느끼고 있지 않나.


뱃속에서부터 데리고 다니고 젖 먹이고 똥 닦아주는 거부터 하나하나 다 해주고 말도 가르치고 이렇게 키웠는데, 점점 나와 다른 모습을 드러내고 내 말에 반대하고 나에게 상처를 주는 아이를 바라본다는 건 어떤 심정일까.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다른 생각과 태도를 그저 다른 것으로 받아들이고 서로의 이야기를 잘 듣고 인정하고 존중해야한다는 걸 글로 볼 때는 다들 끄덕끄덕하지만 진짜로 일상의 순간에 그렇게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그건 어쩌면 습관이나 태도에 더 가깝다. 그렇게 되고 싶다면 운동이나 악기 배울 때처럼 연습으로 몸에 익히는 수밖에 없다. 자꾸 해보지 않으면 머리로 안다고 할 수 있는 게 절대 아니다. 그걸 아이에게 가르치고 싶다면 먼저 부모가 아이에게 그런 태도를 일상 속에서 계속해서 보여주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으리란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해도 될까말까다. 이렇게 함축되어있는 글과 에피소드 뒤에는 얼마나 많은 고뇌와 수행과 다툼의 시간이 있었을까.


나도 기억을 돌이켜보면 10살에서 11살 즈음, 초등학교에서 고학년으로 불릴 무렵부터는 어디 따라다니길 싫어했던 것 같다. 그냥 친구들이랑 놀고, 집에서 컴퓨터게임하는 게 더 즐겁고 편해서 그러고 싶었다. 어떻게 보면 참 작은 일상의 균열에 선생님과 남편분의 만감이 교차하는 시무룩함이 생생하게 전해져서 나까지 묘한 기분이 됐다.

 

책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한다. ‘제가 오히려 아이들한테 배웠어요.’,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하지만 제가 배우는 게 더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분명 좋은 사람들일 거란 생각을 한다. 아이한테 뭔가 배운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으니까. 내가 너보다 몇 년을 더 살았는데, 라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자기 의견을 고집하고 타인을 부정하는 사람이 우리 사회엔 훨씬 더 많아 보인다. 아직 어린 나도 벌써 종종 더 어린 사람에게 그러고 있는 나를 발견하며 깜짝 놀란다.

 

엄마, 아빠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이 깨지는 것, 아이들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줄 수 있다는 믿음이 깨지는 것, 그걸 받아들이고도 서로에게 힘이 되는 소중한 사람들로 남는 것. 그거 진짜 어려운 일 같아 보인다.


내 자식한테 저런 말을 듣게 된다면 정말 화가 나고 슬플 것 같다. 그러나 정말로, 살다보면 정말 날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구나,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으니까. 엄마도 아빠도 나와는 너무 다른 사람이고 날 이해할 수 없다는 게 너무나 답답해서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오니까. 나도 그랬으니까. 양쪽 모두 그걸 받아들일 수 있기까지 서로가 성숙해지는 과정은 얼마나 지난했을까. 선생님도 이렇게 받아들이기까지는 쉽지 않으셨겠지. 아마도.


아이들은 엄마도 아빠도 이제 자유롭게 자신들의 인생을 살라며 놔주었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서운한 일은 아이들이 자라난 일이라는 강성미 선생님. 그 가족 이야기를 보면서 그 오랜 시간을 함께한 것처럼 나도 같이 웃고, 묘한 기분이 되고, 서운하고 허전해졌다. 가족으로 산다는 건 (말도 안 되게 어렵지만) 참 신기한 일이구나.




선생님의 첫 책이었던 내 아이가 사랑한 학교』를 읽고 썼던 글 보러가기.

2013/05/10 - [내가 바라는 책읽기/바라는 삶을 사는 이들] - 강성미, <내 아이가 사랑한 학교> / 잘 먹고 잘 살던 한국생활에서 벗어나 '진짜 나'를 찾아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