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라는 책읽기/바라는 삶을 사는 이들

최성현,《시코쿠를 걷다》, 그리고 그에 얽힌 이야기들

참참. 2016. 3. 28. 22:26


올해 나는 강원도 홍천에서 자연농을 배우는 '지구학교' 수업을 듣는다. 자연농이란 땅을 갈지 않고, 농약이나 비료를 주지 않고, 풀과 벌레를 적으로 여기지 않는 농사의 방법이자 삶의 철학이다. 일본의 '후쿠오카 마사노부'를 창시자로 여기고 그에 따르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자연재배', '생명 농법' 등 여러 다른 말들이 섞여쓰이고 있고 이것들을 엄밀하게 구분하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농약을 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저 '자연'이란 말을 갖다붙이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보통은 쉽게 구분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어쨌든 우리들이 '자연농'이라고 부르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고, 나도 그 가운데 하나가 되고자 한다.

일본에서는 후쿠오카 마사노부 이후로 크게 두 갈래로 뻗어나갔고, 현재에도 생존하여 '아카메 자연농 학교'로 세계적으로도 상당히 유명한 '가와구치 요시카즈' 등 꽤 많은 사람들이 자연농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후쿠오카 마사노부의 《짚 한오라기의 혁명》, 가와구치 요시카즈의 《신비한 밭에 서서》 등을 번역하신 최성현 선생님이 가장 대표적인 자연농 농부로 꼽힌다. 선생님은, 농부라고 하면 흔히 생각하는, 대량의 단일작물 농사를 지어 그것을 판매하여 얻는 현금 수익으로 생활하는 '전업농'은 아니다. 나와 내 가족과 이웃 정도가 먹을 작물을 다양하게 키워, 그것들을 먹음으로써 생활의 상당부분을 해결하지만, 그것을 대량으로 판매하여 도시사람들의 급여와 같은 현금을 얻진 않는다. 대신 선생님은 번역가이자 작가이기도 하다.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온전히 책을 쓰신 최성현 선생님과의 자연농, 지구학교의 인연 덕분이다. 번역하신 책들은 읽어보았지만 직접 쓰신 책을 읽어보지 못했는데, 지구학교라는 인연으로 직접 만나뵙게 되었을 때, 꼭 직접 쓰신 책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책을 쓴 적이 있는 어떤 사람을 알고 싶을 때, 그가 쓴 책을 읽어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 물론, 당연하게도 그가 쓴 책을 읽는 것만으로 그 사람을 다 알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지만,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엿보기엔 최고가 아닐까 싶다.

《시코쿠를 걷다》는 제목 그대로 시코쿠를 걸은 이야기다. 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는 많이 듣고 또 읽어봤는데(특히 순진의 《순진한 걸음》은 정말 좋아하는 책 중 하나) 가까운 일본의 시코쿠에도 이런 순례길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순례라는 건 왠지 참 매력적인 구석이 있다. 나는 종교를 믿지 않지만, 어쩐지 순례라는 말이 주는 느낌, 그걸 상상하면서 느끼는 분위기가 좋다. 직접 하게 된다면 지칠대로 지친 몸이 이 감상에 반대의견을 낼 수도 있겠지만.

걷고 또 걷는다는 것. 그 단순한 일이 사람에게 주는 어떤 것들이 참 놀랍다. 나는 수원에서 경북 문경까지 걸어서 가본 적이 한번 있는데, 그건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하루의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차만 지나다니는 길을 혼자 걷고 또 걸었다. 지난 삶을 돌아보고, 혼자 펑펑 울기도 했다. 아무도 보는 사람도 없었다. 자유로웠다. 살면서 그렇게 자유롭다고 느낀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그리고 정말 많은 것을 받았다.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들은 누군지도 모르는 내게 잠잘 곳을 마련해주고, 밥을 주기도 했고, 길을 알려주기도 했다. 왜일까? 모르겠다. 그저, 사람이란 그렇게 살아왔다는 생각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가장 인상깊은 것 중 하나가 '오셋타이'다. 시코쿠에서는, 특히 순례길에서는 처음 보는 이들에게, 순례자들에게, 그냥 서로에게 잠자리든, 먹을 것이든, 사탕같은 작은 선물이든, 이야기든 주는 것이다. 그런 문화가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왔고, 없어지지 않고 더 넓고, 깊어졌다고 한다. 심지어 돌아오는 공항에서는 '이 사람들 왜 나에게 아무것도 안 주지?'라는 생각이 정말로 들었다는 대목에선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무작정 홀로 걸었던 나도 그렇게나 많은 걸 받았는데, 그곳, 참 가보고 싶어진다.

시코쿠를 걸으면서 생긴 일들, 그걸 받아들이는 태도와 생각들이 참 재밌다. 우선 시코쿠에 가게 된 계기부터 왠지 마음에 들었다. 떠나야할 때에 삶은 우리에게 어떤 신호를 보내는 것 같다. 나 역시, 그렇게 일주일을 무작정 걸었을 때, 출발하기 24시간 전만 해도 내가 그런 여행을 할 줄 모르고 있었으나, 돌이켜보면 등을 떠밀리듯 그 여행으로 연결되는 점들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몸이 아파오고, 그러고나서야 겨우 떠난다. 물론, 더 많은 사람들은 그저, 병원에 가고, 약을 먹고, 돌이킬 수 없을 때까지 버티고 또 버티곤 하는 것 같다. 그건 왠지 슬프다.

글쓴이는 시코쿠 순례길이 종합병원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만난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 삶을 바꾸고 순례를 계속하면서 병이 거의 다 나은 사람도 만난다. 어떻게 보면 참 아름다운 동화같은 이야긴데, 또 한편으로는 그게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다. 당연히, 당연히 그럴 거라는 어떤 직관적인 느낌이다.

다음으로는 글쓴이가 산에서 살았던 이야기가 담긴 《바보 이반의 산 이야기》를 읽고자 한다. 내가 살아가고자 하는 삶을 살고 있는 이이기에, 그가 살아온 이야기가 무척이나 궁금하다. 다른 책인 《산에서 살다》는 절판되어 구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래도 몇몇 도서관에는 있다. 뿐만 아니라 곧 다음 책도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기대하고 있다.

그는 자연농 농사를 가르치는데, 돈도 받지 않는다. 받기는커녕 작년에는 참가자들의 밥을 다 해서 먹였다고 한다. 참가자들의 강력한 반발(?)로 올해는 참가자들이 도시락을 싸와서 나눠먹자고 이야기가 됐다. '오셋타이'가 시코쿠에만 있는 게 아니다. 거의 삶 자체가 '오셋타이'인 사람, 둘러보면 많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도저히 헤아릴 수도 없는 이들이 그저 주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종종 그걸 잊고 내가 잘나서 잘된 것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말 그렇다.

어제도 대놓고 그런 일이 있었는데, 위에서 얘기한 《바보 이반의 산 이야기》를 사러 혜화의 '풀무질' 서점에 갔다가 생긴 일이다. 나는 책을 풀무질에서만 사는 나름 단골이라 가면 늘 이야기를 나누는데(거기 가서 책만 사고 나오는 일은, 분명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어제도 책을 사면서 자연스럽게, 이 책 쓰신 분한테 농사를 배우게 됐다는 얘기를 했다. 그랬더니 그 옆에 앉아계시던 스님께서 갑자기, 본인이 작년에 그 '지구학교' 수업을 들었다고 말씀하시는 게 아니겠는가. 내가 자연농을 배우는 '지구학교'는 올해가 2기, 작년이 처음이었고, 지금까지 그걸 들은 사람은 전국에 고작해야 20명 남짓된다고 알고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을 아무런 약속도 없이 그냥 서점에 책 사러 갔다가 마주친 데다 내가 그 얘기를 떠벌리는 바람에 우리가 서로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참 신기하다. '백두산인'이라고 소개한 스님도 어찌나 반가워하시는지, 두어 시간을 이야기를 나누다 내가 사러 온 책에 《한단고기》까지 사주시고, 저녁밥까지 사주셨다.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저녁 먹고 나오는 길에 사양하고 또 사양했음에도 지폐를 꺼내 돈까지 쥐어주셨다.

이러니 내가 어찌 나 잘나서 살고 있다고 믿을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땐 항상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다. 별일 없을 때도 그저 자꾸 뭘 주는 사람들이 있다. 전생에 죄를 많이 짓지는 않았나보다. 내 '삶' 그 자체도 그렇듯이, 그저 주어진 것들에 고마워하기를 잊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