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13~2019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봤다.

참참. 2017. 1. 9. 12:05
영국도, 크게 다르지 않구나. 영화를 다 보고 그런 생각을 제일 처음 했다. 영화에는 재벌도,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등장하지 않는다. 제도들을 설계하고 어떤 구조를 만들거나 거기에 책임을 져야할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 그걸 통해서 이익을 보고 있는 사람은 모습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거기엔 아파서 질병수당을 받으려는 시민, 아이 둘을 데리고 이사 온 시민, 여러모로 수당이 없으면 생계가 곤란한 지경인 시민들과 그 수당을 안내하고 상담하고 평가하여 지급하는 일을 하는 시민들이 나온다. 상담사나 직원들 역시 본인 돈으로 자선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며, 그 제도나 보험을 설계한 사람들도 아니다. 그냥 먹고 살기 위해 일하며, 책임질 일이나 문제의 소지를 만들지 않기 위해, 또 조금이라도 편하게 일하기 위해서 매뉴얼, 절차, 상부의 지시에 따른다. 다니엘 블레이크가 질병수당을 받을지 취업수당을 받을지 둘 다 못 받을지의 문제는 어떤 사람의 생존의 문제이고 도의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들에겐 언젠가 처리해야하는 업무일 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 역시 그 일자리 없어지면 당장 거기 수당 신청하러 오는 시민들과 별 다를 것도 없는 시민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수당 지급이 늦어지고, 절차 때문에 수당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생기고. 수당을 받을 정당한 권리가 있는 사람들이 수당을 못 받아 죽어간다. 과연 누구의 잘못인가.
다니엘의 옆집에 살며 쓰레기 문제로 티격태격하던 다니엘이 '차이나'라고 부르는 청년의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정확한 단어는 기억나지 않지만 기억을 더듬어보면(명대사를 검색해봐도 이 대사는 올려놓은 사람들이 없나보다), "우연은 없어요. 절차가 복잡해서 수당 신청을 포기하는 사람도 많아요." 정도였다. 어디서 나오냐면, 도서관같은 곳에서 컴퓨터 자리를 구하는 것부터 수당 신청 페이지에 들어가는 것까지 세네 사람의 도움을 받아 겨우 했던 다니엘이 결국은 인터넷 신청에 실패하고난 뒤 그 청년이 집에서 손쉽게 다니엘의 인터넷 신청을 도와주었을 때다. 게다가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수당신청서를 인쇄해주었을 때 다니엘이 느낀 황당함은 어떨까. "뭐야? 그냥 뽑아줄 수 있는 거였잖아!" 다니엘이 종이로 된 신청서를 그냥 인쇄해주면 안되냐고 했을 때 그들은 단호하게 "본인이 직접 인터넷에 들어가서 인쇄해야 합니다. 그게 절차입니다."라는 말만 반복했었다.
누구를 위한 절차일까. 이 영혼없는 절차. 물론 절차는 필요하다. 근데 이게 1, 2년 전에 생긴 게 아니고 아주 오랫동안 지속된 절차라면, 왜 개선되지 않을까. 다니엘은 몰랐을 거다. 40년동안 목수로 일하면서 이 제도가 구체적으로 어떤 절차를 거쳐야 이용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기회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다니엘만 그럴까? 결국 어떤 상황이 되었을 때 도움받을 수 있는 제도는, 많은 시민들은 그런 상황에 빠지지 않을 것이 전제된다. 그렇다면 그 상황에 빠진 소수의 시민들 외에는 실제로 제도를 이용해볼 일이 없다는 거다. 이용해보지 않았으니 그런 제도 있다는 건 알아도 그 운영에 얼마나 큰 문제가 있는지는 모르고, 개선을 요구할 수도 없다. 이렇게 영화로 알려지기 전에는. 오히려 그런 제도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제도를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세금이 게으른 사람들에게 낭비되고 있습니다."는 식의 정치인, 재벌들의 막말 선동이 먹혀들어간다.
영화에서 그 답답한 상담사들 중에도 좀 더 다니엘에게 연민을 느끼고, 절차와 매뉴얼보다는 이 제도가 실제로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순서를 지키지 않고 멋대로 누군가의 편의를 봐주었다는 이유로 주의를 받는다. 분노가 일어나지만, 사실 어느 쪽의 상황도 전혀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근데 그 상담사가 어떻게든 도우려고 제도를 이용하는 방법을 알려주었을 때 다니엘이 이렇게 해봐야 당신과 나의 시간을 낭비하고 남는 것은 자괴감 뿐이라고 하면서, 그 유명한 명대사가 나온다.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라고. 돈 없고 빽 없는 시민들이 너무도 쉽게 그들이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제도에서 배제되어버릴 수 있는 구조가 참 갑갑하다. 
반면 다니엘이 다른 동료 시민들을 돕고 공동체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부분들은 제도에 대한 고발과 함께 영화의 또 다른 한 축의 느낌이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어떤 제도보다 그저 그럴 수도, 그러지 않았을 수도 있는 동료 시민의 행동들이 정서적, 실질적으로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된다. 지금과 같은 사회가 되기 전을 상상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농사라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 먹을 것을 얻는 노동을 하였을 것이고, 그 농산물로 세금같은 것도 납부하였을 것이다. 흉년 등에 대비한 제도 등은 있었겠지만, '실직'을 대비한 실업수당같은 현재와 같은 제도는 전혀 없었을 거다. 그런데 그때도 분명히 아프거나, 장애를 얻어 농사짓기 어려운 신체조건이 된다거나, 남편이 죽는다거나 그런 일들이 있었을 거다. 그랬을 때는 가족과 친척들 그리고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지금의 '제도'라는 것들도 따지고 보면 국가라고 하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위해, 또 나에게도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불운한 일을 대비하기 위해 조금씩 돈을 모아, 일을 할 수 없게 되거나 할 수 있지만 하지 못하고 있거나 너무 어린데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거나하는 사람들을 돕는다라는 것 아닌가? 그러나 얼굴을 알고 어떤 사람인지 아는 사람을 돕는 것과 익명의 시민이 익명의 '수혜자'를 돕는 것은 아주 다른 일이 된다. '게으른 사람들'과 같은 이미지도 쉽게 덮어씌워진다. 우리는 서로 그리 다른 사람들이 아닐텐데.
한편, 이 영화에서 성노동자를 표현한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비판하고 있다. 기존의 사회 제도와 편견을 고발하는 내용이지만 성노동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비판적인 시선 없이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성노동 현장에 찾아가 "이런 일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얘길 한다. 여전히 성노동은 인생에서 막장의 영역이라는 사회적 편견이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고, 다니엘도, 케이티 그 자신조차도 다니엘이 그렇게 말했을 때 그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성노동에 대하여 이선옥님의  이 글을 추천한다. http://singlesparks.net/xe/etc/5663

추신. 이 영화의 많은 문제의식들이 우리 사회와 비슷하다고 느꼈지만, 벽에 락카로 글씨 써버리는 장면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와는 좀 다르다는 느낌 역시 남아있다. 물론 이건 영화일 뿐이고 거기서도 일상적인 일은 아닐 것이지만 우리나라 영화에선 저런 장면이 왠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영화를 보면 지나가던 나이가 꽤 있는 시민이 격하게 추켜세우며 공감하고 지지하고, 다른 시민들도 가던 길을 멈추고 웃으며 구경하고 환호하는데 한국 사회의 시민들이 '공공질서'와 '시민의 권리'를 대하는 태도를 떠올려보면 아득해진다.
누가 우리나라에서 주민센터나 보험공단의 태도에 항의하고자 건물에 락카칠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내가 지나가다 그런 걸 봤으면 난 환호하는 축일 가능성이 높지만 그 환호를 겉으로 드러내는 것은 조심스러울 것 같다. 바로 떠오르는 것은 '아무리 그래도 그런 짓을 하면 안 되지'라는 반응이다. 나이를 떠나서.
그런데 사실 상상뿐 아니라 작년 초, 홍승희 작가는 홍대 근처 공사장 담장에 '사요나라 박근혜' 그래피티를 그렸다는 이유로 검찰에 소환되었고 검찰은 징역 1년 6개월을 구형했다. 다행히 16년 11월에 1심 재판부는 해당 재물손괴혐의에 무죄 판결을 내렸지만. 투쟁과 저항의 역사가 우리 사회에도 없었던 것은 분명 아닌데, 흔히 말하는 승리의 기억이 없어서일까,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에서의 시민들의 행동양식(누군가는 강박이라고까지 표현했던)은 역시 독특했다는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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