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라는 책읽기/바라는 삶을 위한 생각

이인화, 《스토리텔링 진화론》

참참. 2014. 4. 3. 08:30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에 대하여.



스토리텔링 진화론

저자
이인화 지음
출판사
해냄출판사 | 2014-03-0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모든 인간은 작가다”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디지털스토리텔링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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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스토리텔링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됐다. 또 하나의 유행인가 싶어 처음에는 그저 그러려니했는데, 지나면 지날수록 '이야기'가 지닌 힘에 대해 크게 느끼게 되더라. 무언가가 지닌 '이야기'가 없이는 그것의 의미가 우리 안으로 잘 들어오지 않는다. 심지어 이야기가 없이는 무언가를 단순히 기억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무엇보다, 재밌는 이야기를 읽고, 듣고, 보는 것은 참 즐겁다.


이 책은 온갖 이야기와 디지털 스토리텔링 (지원)도구, 쉽게 말해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게 도와주는 컴퓨터 프로그램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의 결과물이다. 이야기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가, 어떻게 하면 이야기를 쉽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연구한 주제겠는가. 이 책에서는 인류가 이 질문에 답하려 연구해온 그동안의 결과물들을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보여준다.


이러한 연구의 영역에 있지 않은 일반인으로서 읽기가 조금은 난해했던 부분도 있다. 예를 들면 이야기, 스토리, 스토리텔링, 서사, 담화, 텍스트 등 일상생활에서 쓰일 때는 그 구분이 모호한 낱말들이 서로 다른 것을 지칭하는 낱말로 구분되어 쓰인다는 점 등이 그렇다. 물론, 이 낱말들을 서로 구분하여 그 성격들을 논함으로써 연구가 진행되는 것이다. 다만 이 낱말들을 거의 동의어로 느끼고 있는, 문외한에 가까운 나와 같은 일반인이 접했을 때는 살짝 혼란스러워지는 지점이다.


역으로 말해 그만큼 저자가 그동안 연구해온 것들을 제대로 풀어놓았다는 것이다. 이론적인 서술뿐 아니라, 그림으로 표현한 '도해'와 실제로 존재하는 이야기들을 뜯어보는 예시도 풍부하게 실어 이해를 돕는다. 스토리텔링에 대한 연구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알고자하는 약간의 지식이 있는 독자에게는 이러한 부분이 더없이 매력적일 것이다.


이 책은 뒤로 가면 앞에서 펼쳐놓은 연구의 성과들을 통해 저자와 연구진들이 실제로 제작한 한국어 스토리텔링 지원도구 '스토리헬퍼'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이 프로그램은 완전 무료다. 당장 사이트에 접속해서 이용해볼 수 있다. 가입하는 데 주민번호조차 묻지 않더라. http://storyhelper.co.kr/ 다 제쳐두고 일단 신기하다. 책에는 가상의 사례를 들며 이 프로그램의 원리와 사용방법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이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는가에 대해선 충분히 얘기한 것 같다. 허나 나라고 하는 독자가 이 책에 흥미를 느낀 부분은 따로 있다.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 구조를 분해하고 분석하는 연구내용들도 재밌지만 이야기를 다루는 그 철학에 나는 더 관심이 있다. 이야기에 대해 오래 연구한 사람으로서 저자 역시 이야기에 대한 어떤 철학을 지니고 있다고 느낀다. 책 곳곳에 나오는데, 특히 끝부분에 집중적으로 나온다.


재밌는 것은, 마지막장을 넘기면서 이 책 역시 '스토리'의 구조와 형식을 따르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거다. 책의 저자는 이야기의 연구자인 동시에 소설가라는 창작자이기도 한데, 책에는 스토리에 관해 이런 이야기가 있다. 스토리는 특수한 문제 설정으로부터 보편적인 문제 해결로 전환되어 간다고. 주인공의 어떠한 특수한 성격, 특수한 상황, 특수한 문제에서 시작하지만 인간과 삶에 대한 보편적인 통찰로 나아간다는 것으로 나는 받아들였다. 그 서술에 비추어볼 때, 소설도 아닌 이 책 역시 '이야기의 구조와 생성 원리에 대한 연구'라는 특수한 문제에서 '이야기란 것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거쳐 '인간 존재의 가치'와 같은 보편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느꼈다.


스토리헬퍼를 만든 철학 역시, 인간은 일하는 존재이기 이전에 노는 존재이며, 창작이란 바로 그 놀이 중 하나이며, 그래서 '모든 인간은 작가'이고 그렇게 되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전문작가가 아닌 일반인도 쉽게 스토리를 만들 수 있는 방향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지나치게 전문화되어 대중의 감성적이며 직관적인 이해와 멀어져버린 '고급한' 이야기 예술을 비판적으로 생각'(287쪽)한다는 지점에 굉장히 공감이 됐다.


아래는 함께 현대를 살아가는 입장에서 지금 하고 있는 일과도 연결되고 공감이 깊이 되어 그대로 옮긴다.

'희소성과 전문성이 있는 생산자가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고 불특정 다수의 대규모 사용자가 그것을 소비한다는 관념은 많은 분야에서 붕괴되고 있다. 광범위한 소셜 네트워크와 스마트 환경을 기반으로 성장한 사용자들은 그 자신이 사회와 인생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발견자이자 표현자이다. 모든 인간은 작가인 것이다.

타인의 수요에 부응하는 생산과 판매라는 자본주의의 시장 형식은 타율적인 것이며 불완전한 것이다. 인간 활동의 최종 형식은 이윤의 계산 없이, 내면적 동기에 의해, 스스로 자발적으로 몰입하는 주체성의 형식이다. 이 같은 주체성의 형식만이 지속적으로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289쪽)


끝으로,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은 어떤 종류의 천부적 재능이 있어야 가능한 것 아닐까라는, 내 안에 깊이 박힌 어떤 자신없음에 대해 이론적, 체계적으로 반박해주는 이런 책은 또 처음이라는 놀라움을 전하며 길어진 글을 맺을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