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라는 책읽기/바라는 삶을 위한 생각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참참. 2013. 8. 11. 10:27



멋진신세계(하서명작선40)

저자
헉슬리 지음
출판사
하서출판사(주) | 2007-11-27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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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자리 협동조합의 공부모임인 생각의좌표 1기를 함께하고 있다. 조지 오웰의 《1984》에 이어, 이 책을 읽게 됐다. 공부모임 네번째 책이다. 바로 전에 읽은 《1984》에서는 세계가 거대한 세 국가로 나뉘어져 정치적으로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게 통제하고 조작을 했다. 《멋진 신세계》는 그와 약간 다르게 과학적인 상상력이 많이 들어갔다. 미래의 과학 발전으로 아이도 '엄마'가 낳지 않고, 공장같은 곳에서 '만들어진다'. 심지어 똑같은 유전자를 여럿으로 분열시켜서, 몇십 명에 이르는 쌍둥이들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들을 같은 공장에서 같은 일을 하도록 만든다. '효율적으로'.

그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반복적인 세뇌교육을 받는다. '병'에 들어있는 태아 상태일 때부터 반복적으로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다. 그 주문들은 주로 각자 자신의 처지가 가장 좋은 처지이며, 행복한 상태라는 믿음이다. 그렇게 반복해 교육시킨 것들은 그들 사이에서 '진리'로 통한다.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문장이며, 가장 자주 떠올리고 또 대화에도 가장 자주 이용하는 말들이 된다.

'숙취가 없는 술', '부작용이 없는 마약'도 개발한 것으로 되어있다. '소마'라고 나오는데, 이건 정부에서 배급을 해서 일정량을 계속해서 나누어준다. 현재 자신의 처지를 가장 행복한 처지라고 믿게 만들고, 그 밖의 다른 것들에 대해 '생각'을 할 수 없도록 빈틈없이 설계를 해놓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속적으로 약간 불운한 일이 생기거나했을 때는 '소마'만 먹으면 된다. 물론 '소마'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역시 세뇌시켜놓는다.

근데 웃기게도 디스토피아 소설이라는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1984》에서 주인공은 누가 봐도 확실하게 행복하지 않았고, 매우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하고싶은 일도 하고싶은 생각도 마음대로 못하고 숨막히는 감시 속에서 살았다. 집 안에서도 텔레스크린의 감시, 어딜 가도 요원들의 감시가 있는 것이다. 그와는 달리, 《멋진 신세계》에 나오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느끼지 못한다. 그러긴커녕 대체로 '행복'하다.

완벽하게 계급을 나누어놓은 계급제 사회(알파, 베타, 감마, 델타 등)이지만 모든 사람은 자기가 그 계급에 속해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도록, 다른 계급을(그리고 그 다른 계급으로 되는 것을) 싫어하도록 세뇌를 시킨다. 알파나 베타 계급은 그 밑의 계급처럼 지저분하고 단순한 노동을 안 한다는 것을 좋게 생각하고, 감마나 델타 등 아래 계급들은 그 윗 계급처럼 '골치아픈'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

질병도 없으며, 늙음과 죽음 때문에 불만족스러워지지 않도록, 사람은 늙지 않고 수명 내내 젊은 육체를 유지하다가 그 모습 그대로 죽도록 유전자 조작 등을 통해 만들어놓았다. 죽는다는 것도 별일 아니라고 느끼도록 어린 아이들에게 그냥 청년 모습 그대로 편안하게 죽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렇게 사람이 죽을 때마다 초콜릿을 주는 교육을 시킨다. '만인은 만인의 것'이라는 세뇌된 진리를 가르치며 아주 어릴 때부터 섹스도 전혀 제한하지 않는다. 오히려 장려한다. 누구 한 사람에게만 사랑을 줘야하고 사랑을 받아야한다는 건 '매우 이상한' 생각으로 여겨지고, 이상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여러 다른 이성들과 관계를 해야하는 세계다.(이 세계에선 그것이 더 '윤리적이고 바르며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럼 모든 사람이 행복한데 무엇이 문젠가? 우리는 지금 행복을 찾으려 그토록 고생하고 있지 않은가? 여긴 질병도 늙음도 없고, 죽음도 고통스럽지 않으며, 언제든지 내 기분을 좋게 해줄 합법적인 약도 늘 갖고 있고, 내가 하는 일도 만족스럽고, 너무 적게도 너무 오래도 일하지 않아도 된다. 와, 이거야말로 모든게 완벽한 환상적인 세계 아닌가?

결국 이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물음은 '행복'이라는 낱말에 닿는다. 우리가 끊임없이 찾아헤매고 있는 그것, 행복이란 대체 무엇인가? 번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내가 읽은 책에서는 249쪽에 이런 말이 나온다. 

'만일 행복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아도 된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이 세계를 설계하고 유지하는 세계총통(이 책에 번역된 낱말)이라는 자의 말이다.

다른 번역에서는 어떤 낱말로 번역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행복'과 '즐거움'이 마치 서로 상당히 많이 다른 것처럼 나온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거의 비슷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인데 말이다. 엄밀하게는 다르지만 즐거우면 대체로 행복하고 행복하면 뭐 즐겁기도 하지 않나?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두 말을 저런 식으로 쓰고 있다. 행복을 염두에 두지 않아도 된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라니. 도대체 행복은 뭐고 즐거움은 무엇이기에. 뒤에는 다시 섞여서 쓰이는 듯한데, 번역되기 전의 원어에서는 어떤 단어들을 서로 비교하고 있는 것일지, 궁금해지는 대목이었다.


338쪽에는 세계총통과 인디언 원주민 보호구역에서 온 '원시인'(우리와 비슷한 존재)이 이런 대화를 나눈다.

"우리들은 안락하고 즐거운 것을 좋아한단 말이야."
"하지만 나는 안락하고 즐거운 것을 원치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해요. 뿐만 아니라 나는 참다운 위험을 원하고, 나는 자유를 원하며, 선량함을 원합니다. 그리고 나는 죄를 원합니다."
"말하자면," 무스타파 몬드는 말했다. "자네는 불행하게 될 권리를 요구하고 있는 셈이군."

그는 참으로 안락하고 불만가질 것 없는 생활(그는 그것을 '거짓된 행복'이라고 생각했다)을, 거부했다. 당당하게 불행하게 될 권리를 요구했다. 그는 그들이 받는 세뇌를 받지 않은 대신,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읽고, 감동받고, 줄줄 외우고 있는 다른 세계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원시인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사람을 대표한다고 보기엔, 지금 우리 세계에는 불행하게 될 권리를 요구하지 않을 사람도 많을 거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굳이 왜 불행해지려 하겠는가. 우리가 안락하게 살고자 얼마나 노력하는데.


그 작업은 그를 몹시 신나게 했다. 런던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몇 주일을 보내며, 무엇인가를 하고싶다고 생각해도 언제나 스위치를 누르거나 핸들을 돌리는 것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터였으므로, 솜씨와 끈기가 필요한 무엇인가의 일을 하는 것은 정말 신이 났다.(347쪽)

나는 이 대목에서 뭔가 힌트를 찾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자신의 의지로, 솜씨와 끈기를 발휘해서 무언가한다는 것. 창의력을 발휘하고, '부족한' 것을 자신의 힘으로 채워나간다는 것. 그리고, 그럴 수 있는 자유.

내가 보기엔 《1984》와 《멋진 신세계》의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애타게 찾는 것이 바로 '자유'다. 심지어 '불행할 수 있는' 자유마저 요구하고 있다. 우리 공부모임의 첫 책이었던 《자발적 복종》을 읽고 모였을 때도 자유란 도대체 무엇인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를 우리는 원하는 것인가, 자유로운 것이 정말 행복한 것인가에 대해, '결론'을 내기는 어려운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얼마 전 고병헌 선생님의 작은책 강연을 들었는데, 그 강연에서도 사람이 자유로울 때 가장 행복하지 않냐는 말씀을 하셨던 것 같다. 


이런 물음에 대해서 어떻게 결론을 내릴 수가 있겠는가. 사실 자유란 무엇이고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또 시기마다 다른 답을 지니게 되는 것이고, 또 평생을 고민하고 찾아야하는 것이 아닐까싶다. 나만해도 늘 거기에 대한 생각이 변한다. 다만 그것들을 계속 미루지만 말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찾아보는 시간들은 참 소중하고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나는, 자유란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내가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흔히 쓰이는 비유로 가면을 벗은 맨얼굴의 상태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게 참 쉽지 않다. 진정한 '나'는 대체 뭔가, 이것도 어려운 문제고. 근데, 그럴 수 있을 때 정말 자유롭고 행복하고 충만하다는 걸 느낀 적이 있다. 내 안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은, 어떤 나 자신의 목소리랄까, 생각같은 걸 느끼고, 그걸 이성이란 이름으로 거부하지 않았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