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13~2019

'시민(서민)에게 인문공부가 필요한 이유' - 고병헌 선생님 작은책 강연 뒷이야기.

참참. 2013. 7. 26. 14:01

'시민(서민)에게 인문공부가 필요한 이유' - 고병헌 선생님 작은책 강연 뒷이야기.


강연장소가 바뀌어서 좀 헤맸다. 덕분에 7시가 다 되어서야 헐레벌떡 강연장에 들어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만 헤맨 것이 아니어서 강연을 좀 늦게 시작하게 됐다. 나는 그 사이에 김밥 한 줄을 다 먹고 음료수까지 마셨다. 그러고는 차분하게 수첩을 펴고, 펜을 들었다. 한마디로 아주 모범적인 자세로 앉아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이 정도면 칭찬받아 마땅한 자세라며 내심 뿌듯해하고 있던 바로 그때! 시작부터 듣는 이들을 잔뜩 웃게 만들던 선생님의 손가락이 바로 나를 향했다.

"이거 적으면 집에 가서 보냐고."

아니, 이럴수가. 분명 오늘 처음 뵈었는데 내가 수업시간에 필기한 걸 다시 펼쳐본 적이 단 한번도 없음을 어찌 아셨을까? 순식간에 정체를 들켜버린 나는 조용히 수첩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말마따나 다시 보지도 않을 것이고, 이 순간 나에게 와닿는 것들을 잘 받아들여서 내 안에 담아가면 그것이 성공인 것이다. 

실은 그러고도 한참을 아이고, 이거 적어서 나중에 다시 보고 싶은데, 이렇게 듣기만 하면 금방 잊어버릴 텐데, 하고 걱정이 됐다. 작은책 다음 호에 특집 기사로 나오면 다시 읽어볼 수 있다는 걸 아는데도 이러니, 내 병이 깊다. 돌이켜보면 중학생 때까지는 필기란 걸 하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 지금 들으면서 다 이해가 안 되니 적어뒀다 나중에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필기한 것들은 다시 보지 않았고, 그러느라 수업만 더 못 들었다.

그걸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뭔가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필기를 멈출 수 없었다. 곰곰 생각해보니, 그건 결국 '불안' 때문이다. 잊어버리면 안 된다는, 이 시간에 뭔가 남기지 않으면 뒤처지는 것이라는 불안감 말이다. 부모는 불안하면 애를 잡고, 청년은 불안하면 스펙을 쌓는다고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그 불안 때문인지 요즘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바쁘다. 이렇게 바쁜 시대에, 특히나 더 바쁜 서민들이 인문 공부를 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가 공부해야하는 이유는 뭔가? 우리에겐 사회가 내보내는 오염된 생각들을 걸러낼 수 있는 정화장치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사유'의 힘이다. 사유라는 것은 '드는 생각'이 아니다. '드는 생각'은 철학적 용어로는 '반응'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반응을 나의 주체적인 생각인 줄 착각하고 산다. 그렇게 습관적으로 올라온 생각을 다시 한번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진정한 생각이고, '사유'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발생한 문제는 그 문제를 발생시킨 지금까지의 생각과 행동으로는 절대 풀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해야한다.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바로 그것이 공부인 것 같다. 공부라는 것은 바로 방금 전 순간까지 익숙해있던 내 생각들을 낯설게 보는 것이란다. 이제야 공부가 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확실히, 중고등학교 때 죽어라했던 건 공부가 아니었다.

이러한 공부모임이 지역마다 있으면, 정화장치가 커지는 것과 같다고 피피티로 설명해주셨다. 작은책과 같은, 이렇게 공부할 수 있는 모임들이 지역마다 있다면 참 좋겠다. 

마지막에는 다른 분의 질문 덕택에 선생님의 따님과 아드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따님은 무려 나와 동갑내기였다. 검정고시를 본 뒤 지금은 마을에서 공방같은 곳들과 협조하여 아이들에게 치유와 배움을 주는 '1시간 학교'를 함께하고 있다고 하셨다. 진짜 멋지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씁쓸했던 것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다른 친구들이 당연하다는 듯 대학에 다닐 때,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은 '설명해야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왜 대학에 가지 않았는지, 내가 하는 일은 어떤 일인지 설명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대학에 다니는 아이들은 왜 대학에 갔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는데 말이다. 아픈 현실이다.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어졌다.

나는 학교를 그만두지 않고 휴학만 하고 있는데도, 끊임없이 설명해야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학교에 다닌다면, 혹은 스펙을 쌓고 있다면 한마디로 될 것이, 점점 복잡해지고 어려워진다. 누구나 다 가는 길을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은 외롭고 때론 지치는 일이 되기도 한다. 허나 선생님께서 강연 시작하시며 했던 말씀처럼, 우리는 지치면 안 된다. 지치도록 하면 안되고 즐겁게 해야한다. 밝고 즐거운 모습으로, 건강한 낯섦을 가정에, 이웃에 잔뜩 나눠주어야 한다. 존재가 희망이 되도록. 아, 솔직히 그 정도까지는 자신이 없다. 다만 존재가 폭력이 되는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해야겠다고 다짐을 해본다.

"널 고통스럽게 하는 그 고민은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다 먼저 했어. 자신의 온 삶을 걸고 거기에 답을 해서 책으로 남겨놨어. 그게 고전이야. 그러니까 너무 슬퍼하지 말고 너무 걱정하지마!"

선생님께서 뒤풀이에는 함께할 수 없다고 하셔서 무척 아쉬웠다. 그런데 그 이유가 참 아름답다. 가족들에게 혼난다는 것이다. 저녁마다 가족들끼리 함께 오늘의 이야기를 나눈다고. 우와, 진짜 멋지다! 나중에 아빠가 된다면, 완전 본받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