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13~2019

뜬금없는 여행, 두번째 이야기.

참참. 2013. 6. 21. 08:33


철물점을 여시는 맹리 이장님과 만나게 되어, 다시 한번 인사를 드리고, 커피를 한잔 얻어마시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침에 걸을 때가 제일 좋았다. 몸도 가뿐했고, 날씨도 아직 선선하고 상쾌했다.
그렇게 아침을 걷고 있는데, 아침부터 자전거를 타고 나오셔서 도로 옆에도 뭔가를 심고 계신 할아버지.



아래쪽은 속살을 다 드러낸 언덕 위에 소나무들이 마치 까치발을 든 듯, 위태롭게 서 있었다. 왠지 조금, 서글퍼졌다.



페인트를 파는 곳인 것 같은데, 저 벽에 칠을 하다가 만 것 같은 페인트는, '디자인'인 걸까?



빨래집게들이, 알록달록하고 예뻐보였다.



화물차들이 무서운 기세로 지나다니는 국도의 갓길은, 달팽이들의 천국이었다. 
수도없이 많은 달팽이들이 기어다니고 있는 걸 발견했을 때, 힘차게 내딛던 발걸음이 주춤, 난감해졌다.

달팽이를 피하며

'저 거대한 트럭들이 내게 순간에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재앙이듯, 달팽이들에게는 나 역시 그만큼이나 재앙이 될 수 있겠지.'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무심코 걸어왔던 길 위에 나도 모르는 사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상처입혔는지 모른다는 생각도.

 

달팽이를 피하며 2

달팽이들 바로 옆으로는 온갖 차들과, 나같은 사람까지 목숨을 순간에 앗아갈 수 있는 위험들이 계속 지나다닌다. 갓길을 걸을 때면 바로 한걸음 옆을 빠르게 지나치는 거대한 트럭들이 참 무섭다. 달팽이들도 무서울 법도 한데, 자기 갈 길을 자기만의 속도로 태연하게 가고 있을 뿐이다. 나도 언제든 날 칠 수 있는 그 트럭들이 종종 무섭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주저앉아 울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계속 걸었다.

삶에서도 그럴 수 있을까? 바로 옆으로 지나치는, 언제든 내게 덮쳐올 수도 있는 불운들을 보면서도, 그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고,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삶을 살아내고 싶다. 난 그렇게 강하지 못해서, 그것들을 보면서도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걸어갈 수는 없을 거다. 그렇지만, 무섭기도 하지만, 결국 내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은 그렇다고 깨달아 인정하고, 흔들리면서도 주저앉지는 말고 나아갈 수 있기를.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단지 한걸음을 걷는 것뿐이지만, 그 한걸음들이 모여 나를 수원에서 여기까지 오게 했듯, 한번에 두 걸음을 걸을 수 없다며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한걸음씩 옮길 수 있기를.

길 위에서는,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달팽이나 나나 별 차이가 없었다. 죽음이 늘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는 것은, 차라리 축복일지도 모른다. 목표와 방향과 일정은 있지만, 계획을 하지는 않겠다. 특히, 그놈의 계획이란 것 덕분에 지금 현재의 삶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즐기지 못한다면 즉시 폐기해야 한다. 삶이 어떻게 끝날지를 누구도 계획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에 내 마음을 따라서 사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하고싶은데 못 해봐서 억울한 일들, 이젠 만들지 말아야지. 내일 죽는다해도 웃으면서 떠날 수 있게. 



내가 못 찾은 것인지 몰라도, 옆을 둘러봐도 아무 설명도 없었다. 시크하게 그저 서있다. 뭔가 의미가 있을 법도 한데, 구태여 설명하지 않으니, 보는 이가 알아서 느끼라는 걸까.


용인을 지나 안성시에 들어왔더니, 동아리 선배가 생각나서, 연락을 했다. 가까운 곳이면 자고 가려고 했는데, 알고보니 내가 지나가고 있는 곳과는 안성시에서 반대쪽이었다. 그냥 가던 길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선배가 학교 근처 방에 안 가고, 안성으로 오겠다고 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던, 이야기가 떠올라서 그냥 가지 못하고 선배네에서 하루를 지내기로 했다.

원래 가려던 길에서 벗어나 안성시내 쪽으로 걸었다. 갑자기 오후 시간이 빈 셈이 되어, 길 옆에 있던 안성허브마을에 가봤다.

뭔가를 버리기가 미안해지는 휴지통.

허브이름이 붙어있는 펜션들이 잔뜩.

요런 귀여운(?) 인형들이 있었다. 삽질 좀 해봤나?


사실, 이때 발에 물집이 잡히는 감이 왔다. 왼쪽 발목도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허브마을까지 은근히 먼 거리를 길에서 벗어났던 걸 조금은 후회하기도. 다시 길로 돌아와 안성시내 쪽으로 한참을 걷다보니, 지나가던 경찰차가 내 앞에 와서 섰다.

어디까지 가냐기에, 안성버스터미널 간다고 했더니, 여기 인도도 없고 얼마나 위험한데 그렇게 멀리까지 걸어가냐며(사실 1시간 남짓한 거리가 남았지만, 그동안 걸은 길에 비하면 거의 다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타라고 했다. 고맙게 탔다. 그 덕에 선배보다 일찍 도착해서, 오일장 구경하러 갔다. 거기서도 사실 하루종일 걷느라 지쳐서, 돌아다니기보다 앉아있었지만.

선배의 가정집은 하나도 찍지를 못했다. 저녁으로는 어머님께서 돼지고기를 구워주시고, 다음날 아침도 얻어먹고, 터미널까지 차로 태워다주시기까지 했다. 사실 이번 여행에 든 전체 경비를 생각했을 때 엄청난 돈인 2만원을! 아버님께서 맛있는 거 사먹으라며 주시기도 했다. 후배들 챙기고 동아리에서 늘 뭔가 만들어주시는 형의 성품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구나, 싶었다. 막걸리 마시면서, 형이랑 길다면 긴, 얘기를 나눴다.



걸은 길. 경찰차를 얻어탈 때까지, 약 31킬로미터. 쓴 돈은 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