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13~2019

뜬금없는 여행, 첫번째 이야기.

참참. 2013. 6. 18. 09:03


뜬금없이, 여행을 갔다.

걸어서 부산까지 - 라는 생각으로 출발했지만, 5박 6일의 여행을 마치고 경북 문경에서 돌아왔다.

6월 11일 화요일 새벽부터, 6월 16일 일요일 돌아오기까지. 걸었던 이야기, 그리고 만난 사람들 이야기. 시작.


첫날은 집에서 새벽같이 일어나, 갑작스럽게 짐을 싸고,(아버지께 이때 여행간다는 걸 처음 말씀드렸다. 하긴 나도 고작 이틀 전에 결정한 거니까, 뭐.) 출발했다. 짐 싸는 데 아버지께서 도움을 주셨다.

최후의 아침을 먹고, 건빵 3개짜리 묶음과 초코바 4개, 생수 한 병과 일회용 우비를 샀다.


이 날은 걷는 내내, 아직 잘 실감이 안 났다. 수원은 어찌나 큰지, 걸어도 걸어도 계속 수원이더라. 그동안 지하철 타고, 버스 타고 갔던 수원역, 수원버스터미널이 나오고, 더 지나니까 드디어 용인을 넘어가긴 했으나, 옆에 차가 어찌나 많이 다니는지, 전혀 여행하는 느낌이 안 났다. 그냥 계속 도시고, 익숙한 편의점들과 풍경들, 계속 지나다니는 차들.




요상한 동그라미 육교라는 것도 건너고.

말로만 듣던 용인 경전철도 보고.


본격적으로 인도도 없고, 자전거도로도 없는 17번국도를 걷기도 했다.


하늘은 내내 구름이 껴서 흐린 상태였다. 시원해서 좋기는 했는데, 언제 비가 내릴지 알 수 없어서 불안하기도 했다.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을 때, 네이버지도 상으로 조금만 더 가면 나오는 마을이 있기에, 거기서 자야겠다고 국도를 한참 들어갔다. 그랬더니 점점 빗방울이 굵어지더니, 마구 쏟아지는 거다. 으악. 다리 아프던 것도 잊고, 속보로 뛰듯이 걸었다. 한참을 그렇게 걷다보니 옆에 웬 컨테이너 조립식 건물로 된, 공장같은 건물이 나왔다. 거기 사무실로 무작정 들어갔다.

"이 인간은 뭐지?" 하는 눈으로 쳐다보시던 아저씨 세 분. 아하하. 쭈뼛거리며, 여행 중인데, 비 좀 잠시 피하다가 가도 되냐고 여쭈었더니, 흔쾌히 그러라고 하셨다. 오늘 출발했다니까, 일기예보도 안 봤냐며. 음. 보긴 봤지만.

한분은 젊었을 때 꼭 해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난데, 결국 못 해봤다며, 잘해보라고 격려해주셨다. 따뜻한 커피도 타주셨다.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이 있고, 비도 좀 잠잠해져서 가려는데, 우산까지 주셨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마을이,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맹리.


맹리 마을회관.

주민분들께 물어물어서 철물점을 하고 계신다는 이장님께 찾아가서 허락을 구했다.


이장님께서는 이런 일은 처음 있는 일이라며, '눈길을 걸을 때는 모름지기 발걸음을 어지러이 하지 말라.'는 말을 되새기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다음에 또 자네와 같은 학생이 왔을 때 우리 마을에서 그 학생을 대하는 태도가 어떻게 되겠냐며.

또한, 세상이 무섭다, 험하다고 하는데, 사실은 '나 하나만' 잘하면 좋은 세상이지 않겠냐고. '나'만 잘하면 다 좋은 세상이 되는 거라고, 그런 거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제일 좋았던 말씀은, 회관에 라면 있으니 먹으라는 말씀?

그리하여, 첫날 저녁과 둘째날 아침은 회관에 있던 라면과, 회관 바로 앞집에 사시던 아주머니께서 주신 밥으로 해결했다.

저녁 먹고 좀 있으려니까, 부녀회장님께서 오시더니, 누구냐며 - 자초지종을 설명드렸더니 이장님께 전화 한 통 하시고나서, 냉장고에 있던 수박을 꺼내 썰어주셨다. 이렇게 고마울 때가. 아직 집에서도 못 먹은 수박을 여기 와서 먹다니.


나올 때는 처음 들어올 때보다 더 깨끗하게 만들어놓고 나온, 내가 잤던 방.


비가 와서 좀 일찍(오후 6시 즈음) 회관에서 쉬게 된 덕에 밥을 먹고, 수박을 먹고도 긴 시간을 혼자 생각할 수 있었다.

펜을 들고 끼적거리기도 하면서. 내가 떠나온 이유는 무엇인가, 이 길 위에서 어떤 마음을 내려놓고자 하는가.
걸어오면서 떠올린 많은 기억들..


첫날 걸은 길. 약 40킬로미터. 쓴 돈은 생수, 건빵, 초코바, 우비 - 7900원.

무식하게 네이버지도만 믿고 가는 게 아니었다. 네이버지도라 하더라도, 자동차 기준으로만 늘 안내가 나오기 때문에, 자동차로 설정이 되었더라도 거리로 '최단'을 눌러서 그날그날 목표한 곳까지의 길을 다시 보았어야하는데, 이건 나중에야 깨달았다. 처음에는 당연히 그냥 출발지에서 목적지인 부산까지 고속도로만 제외하고 나오는 '무료' 자동차경로로 검색해놓고, 그대로만 쭉 따라가면 될 줄 알았는데, 그렇게 가면 걸어가는 사람 입장과는 많이 달라서(옆으로 빠져서 걸어가면 거리 상으로 훨씬 가까운데, 차는 그냥 그 도로를 타고 쭉 가는 것이 이득인 경우가 많은 것인지), 거리 손해도 많이 나고, 인도도 없는 차들이 많이 다니는 큰 길들 위주로 나와서 걷기도 불편하다. 종이 지도를 사서 걸을 길을 표시해가며 가는 것이 거리 상으로 보나, 뭘로 보나 이득일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부산까지 걸어가는 사람을 위한 길안내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윽.


추신. 종이 지도 한 장없이, 모든 걸 손전화기에 의존하고 있는데, 그걸 물에 빠뜨렸다. 덕분에 출발하자마자 여행이 끝날 뻔 했다. 다행히 전에도 물에 빠뜨렸던 적이 있어, 이제 대처법을 확실히 알고 있었기에, 바로 꺼내서 배터리부터 분리했다. 밥을 주신 아주머니께 부탁해서, 드라이기도 빌렸다. 한참을 말리고, 배터리 끼우고 켜보니, 됐.다. 휴~
빌린 드라이기는 손빨래한 속옷과 양말 말리는 데도 유용하게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