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13~2019

여성주의 저널 일다 10주년 기념 심포지엄, "여성주의와 기록" 뒷이야기.

참참. 2013. 6. 3. 11:12

전주에서 여성주의 저널 일다(http://ildaro.com/) 10주년 기념 심포지엄을 한다는 소리를 듣고, 신청해서 다녀왔다.
1박2일 일정으로 신청했고, 지난 5월 25일 토요일에 전주로 내려갔다.

전주에 갔더니, 버스 정류장과 공중전화 박스도 이런 지붕들을 얹고 있었다. 

여유있게 도착했는데, 시민 놀이터를 못 찾아 길을 좀 헤맸다. 스마트폰으로 열심히 검색해서 겨우겨우 찾아갔다.


땀을 뻘뻘 흘리며 헤매다 드디어 찾았을 때, 얼마나 기쁘던지.


시작하기 전에 찍어보았다.


귀엽고 맛있는 떡도 준비해주셨다!

시작 전에 일다에서 '스무살 여연의 공상밥상'을 연재하고 있는 필진 여연 님의 클래식 기타 공연이 있었다.
일다에서 여연 님의 '학교 밖 십대로서 마지막 해를 보내며'
http://ildaro.com/sub_read.html?uid=6090&section=sc5&section2=%BD%CA%B4%EB
라는 글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기에, 또 거기에 기타연주로 용돈을 벌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에, 실제 앞에 나와서 기타연주를 해주시니 신기하고 재밌었다.

행사는, 위 사진에 보이는 순서대로 이야기를 듣고, 참여자들의 질문을 받아 함께 이야기하는 순서로 진행됐다.

장애여성네트워크의 글쓰기는, 장애인에다 여성이라는 두 가지 조건이 겹쳐, 차별과 억압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던 장애여성들에게 힘을 주는 일이었다고 한다. 위 사진 속의 자료집에 있는 글을 인용하면

"저는 타자가 남들보다 거의 3배나 느려서 7~8시간 동안 글을 쓰죠. 글을 쓰다가 생각도 막히고 몸이 너무 힘들면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몇 백번 들곤 하지만 나 자신을 이기고 싶다는 마음이 더 앞서 글을 완성해요. 잘 쓴 글이든 못쓴 글이든 인내하며 완성된 글을 보면 제가 가치 있는 존재처럼 느껴지고 보람찬 희열이 마구 가슴을 두드려서 벅차오르죠."(심포지엄 자료집 5쪽)

"글쓰기 모임에 나가는 길은 늘 즐거웠다. 수업 방식도 평가를 받는 수업이 아니라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나를 찾는 작업은 흥미로웠으며 글쓰기에 서툰 사람도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수업이었다. 모임이 끝나고 얻는 가장 큰 것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말할 수 있는 용기."(심포지엄 자료집 5쪽)

'글쓰기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였다. 그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북돋아줄 동료와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기꺼이 용기를 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짧은 기간에 많은 성취를 이루었다.'(심포지엄 자료집 6쪽)


진심으로 멋진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말을 하는 것과는 다르게 뭔가 특별한 기술이 있고, 지식인이어야만 할 수 있는 일처럼 여겨지곤 한다. 그렇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술의 영역에 들어가는 글쓰기도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글쓰기란 것은 말하기와 마찬가지로 누구나 쓸 수 있는, 의사소통과 기록의 방법인 것이다. 글을 쓰다보면, 자기도 몰랐던 자신의 생각이 눈앞에 펼쳐지기도 하고, 나를 정리하고 되돌아보게 되기도 한다. 장애여성들이 이런 일들을 경험하고 함께 계속 해나갈 수 있도록 하는 '장애여성네트워크'의 활동이 무척 의미있는 일이라고 느꼈다.


그 다음 이야기는 '줌마네'였는데, 장애여성네트워크의 이야기에서, 처음에 줌마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줌마네에 대해 궁금한 상황에서 바로 딱, 줌마네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실제로 '줌마네'와 함께하면서 직접 겪으신 이야기를 해주셔서, 생생하고 진실된 느낌이었다. 줌마네를 처음 기억하게 되신 것은 '글쓰리고 마음의 힘기르기'라는 수업이름이 실린 기사 덕분이라고 하셨다. 그러고도 시간이 좀 더 지난 뒤, 수업을 들으셨다고.

그렇게 듣게 된 첫 수업에서, 선생님은 글쓰기 스킬을 가르치지는 않을 것이며, 글쓰는 사람으로서 가져야할 마음가짐과 삶의 방식에 관한 얘기를 할 거라고 하셨단다. 이때 받은 수업들의 이야기는, 나도 한번 따라서 해보고 싶은 재미있는 것들이 많았다.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시간대별로 기록하는 하루 일지, 한 장소에 최소한 두 시간 이상 머물며 어떤 사물을 그림처럼 상세히 묘사하기, 소설 필사하기, 집안 식구 묘사하기,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공간 묘사하기, 친구 인터뷰, 소설 고쳐쓰기, 일회용 카메라로 찍은 사진 5장으로 이야기 만들기, 소리내어 책읽기 등등.'(심포지엄 자료집 10쪽)

이 과정이 몹시 즐거우셨다고 전해주셨다. 자료집에 쓰신 글에서 또 인상깊었던 것이, '실은 바닥난 자존감과 자신감이 더 문제가 됐고 그것들을 끌어올리는데에도 글쓰기는 좋은 도구였습니다.', '더 나아가 늘 피해자인줄 알았던 내가 가해자일 수도 있겠다는 벼락같은 깨달음도 함께.'(심포지엄 자료집 11쪽)와 같은 문장들이었다. 단박에 극적으로 바뀌지는 않지만, 재미있게 놀면서 삶까지 조금씩 바뀌어나간다는 이야기가, 가슴에 와닿았다.

제 꿈 가운데 하나가 나중에 글쓰기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는 것인데, 줌마네 '글쓰기로 마음의 힘 기르기' 선생님의 수업을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 들었던 발제였다.


세번째로 이야기해주신 분은 여성노동자글쓰기모임의 안미선 회원님이셨다. 여성노동자글쓰기모임은 여성노동자들의,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기록되지 않은 노동'을 직접 기록할 수 있도록 하는 모임이었다. 자료집의 발제문을 보는데, 그동안 해온 활동 내용에서 내가 최근 재밌게 읽었던 <여자, 노동을 말하다>의 박수정 작가님 이름이 많이 보여서 신기했다. 여성노동자글쓰기모임에서 일다에 연재했다고 하는, '기록되지 않은 노동'의 목소리도 굉장히 인상깊었다. 소규모 하청공장의 여성들, 요양보호사, 산모도우미, 호텔 룸메이드, 시각장애 안마사 등 실제로 어떤 노동과 어떤 삶을 겪고 계신지 알기 어려운 분들의 이야기를 기획해 연재하셨다니, 중요하고 소중한 기록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앞으로 일다 더 열심히 봐야겠다. 발제문 끝에 ''지금, 여기'에 있는 것에서 시작하여 기록하고 목소리를 낼 때, 그것이 가장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고 의미 있고 깊이 있는 기록물이 될 수 있다.'(심포지엄 자료집 20쪽)라는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


네번째 이야기는 전주 여성다시읽기 모임의 이야기였다. 지역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내는, 진정한 풀뿌리 모임의 모습이었다. 게다가 굉장히 오래 이어오셨다니. 이렇게 오래 하실 수 있었던 건, 내가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꼭 해야한다거나 그런 마음보다는 재미있게 모여서 수다 떨고 노는 느낌으로 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뒤에 뒤풀이에서 일다를 함께 만들어오신 윤정은 작가님께, 일다를 10년이나 잘해올 수 있었던 힘도, '재밌게' 해왔기 때문이라는 말씀을 들었다. 재밌게 가야 오래간다고. 여담이지만 윤정은 작가님은 나중에 생년월일로 타로점까지 봐주셨는데, 놀랍게 잘 맞았다. 두 분의, 두 모임의 비법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면서, 내 안에 남았다. 하고싶은 일을, 재밌게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잘'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다. 억지로, 의무적으로 하는 일은 창조적이기도 어렵고, 오래 가기도 어려울 거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잖아!


다섯번째 이야기는 성공회대 NGO대학원 실천여성학전공 교수, 허성우 선생님께서 해주셨다. 선생님께서 그동안 살면서 여서주의를 접하게 된 이야기도 재밌었고, 무엇보다 지금 대학원생들을 가르치는데, 그 대학원생들에 대해 하신 말씀이 제일 재밌었다. 다들 대단하신 분들이라 '학생님들'이라고 부르신다면서, 심포지엄을 하는 전주까지도 학생님을 만나러 내려온 것 아니냐며, 일다 창립인이신 조이여울 선생님(혹은 학생님)을 가리키기도 하셨다. 하하하하.

자료집에 써주신 글에 기록에 대하여 굉장히 멋진 말이 있어서 인용하며, 발제문 이야기를 끝내려고 한다.

'기록은 언어화이자 의미화이고 그래서 정치이자 '힘'이다. 무의식의 의식화, 욕망의 발현, 그리고 의식의 재의식화이자 새로운 정치적 전망의 표식을 제공한다. 기록은 단지 '하나의 자명한 사실'에 대한 수동적 서술일 수 없고, 바로 그 '사실'이라고 가정되어지는 어떤 것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자 해석이며 의미화 획득의 과정이다. 지나간 것과 지금 있는, 그러나 발화되지 않아서 과거의 시간에 놓여있는, 그런 것들에 관한 새로운 해석과 의미화야말로 단일한 것으로 고정되었고 닫혀졌던 세계를 또 다른 세계와 연접한 문을 열어 제치는 해방적 실천이다. 기록의 과정을 거친 활동가들이 내가 그랬듯 재탄생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가슴으로 느낀다.'(심포지엄 자료집 32쪽)


(사진 출처 - 일다 http://ildaro.com/bbs.html?Table=ins_bbs1&mode=view&uid=279&section=)
심포지엄 자료집 전체 보기 - http://ildaro.com/bbs.html?Table=ins_bbs1&mode=view&uid=279&section=


심포지엄이 끝나고 참여하신 분들과 함께 밥을 먹으러 갔다. 올 1월에 내일로 여행으로 전주에 왔을 때도 못 먹었던 전주비빔밥을 드디어 먹어보게 됐는데, 맛있었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제일 많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분들은, 전주에서 살고 계신 어머니와 미국에서 동아시아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따님이었다. 아, 참고로 여기 참여하신 저 수많은 분들 중에 남자는 나를 포함해서 넷밖에 없었다. 평소에 잘 듣지 못하는 어려보인다는 말을, 심지어 고등학생인 줄 알았다는 얘기를 두 번이나 들은 것이 자랑. 이야기를 나누었던 두 분은, 두 분 다 굉장히 편안한 느낌을 주시는 분들이셨다.

어머님은 이렇게 젊은 남자가 혼자 이런 여성주의 심포지엄에 찾아왔다는 것을 상당히 놀라워하셨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좀 놀라운데, 이렇게까지 남자가 없을 줄은 정말 몰랐다. 두 분도 굉장히 멋졌다. 미국에서 홀로 공부를 하고, 대학까지 들어가서 동아시아학을 전공하고 있는 나보다 어린, 민지님도 굉장히 멋졌고, 그걸 가능하게 해주시고 또 한국에서 아드님을 키우시며 이런 자리에도 따님을 데리고 나오신 어머니도 굉장히 멋지셨다. 전주에 살고 계셔서, 식사 끝나고 숙소에서 이어진 술자리에 자리가 좁아서 그냥 집으로 돌아가셨는데, 다음날 아침에 오기로 하셨지만 결국 다시 뵐 수 없었다. 아쉬웠다.

숙소에서 함께했던 술자리에서는, 스무살 여연님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기타는 어쿠스틱 기타를 친다고 하니까, 제대로 된 분께 배우라고 권해주셨다. 스무살이신데 기타도 잘 치시고, 공상밥상 칼럼 보면 글도 참 잘 쓰신다. 나는 스물넷인데 잘하는 거 하나 없는데, 흑흑. 잘 웃고, 유쾌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셔서 글로만 뵈었을 때보다 더 매력적인 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앞으로 일다에 공상밥상 글을 꼬박꼬박 찾아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몇 안되는 남자분 중 한 분은, 양심적 병역거부로 수감되셨다가 출소하셨다고 한다. 이럴 수가! 양심적 병역거부 이야기는 많이 들어보았는데, 실제로 그렇게 다녀오신 분을 뵌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대다수의 양심적 병역거부자와는 달리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종교의 신자도 아니라고 하셔서 더 놀라웠다. 주변에 그런 분위기나, 그런 일을 한 아는 사람들도 없는 상태에서의 선택이라 더 어려울 거라 느껴졌기 때문이다. 힘드시진 않았을까했는데, 군대에 가도 이 정도 고생은 할 거다라는 생각을 해서, 그 대신 총을 들지는 않고 조금 고생하는 거니까 괜찮았다고 하셨다. 어째, 요새 돌아다니며 만나는 분들은 멋진 분들뿐이다. 내가 군인이던 때 읽은 <군대를 버린 나라>라는 책이 떠올라 이야기를 했더니, 역시 아셨다. 난 부끄럽게도 군대를 다녀왔지만, 남북도 얼른 통일이 되고, 나아가 전세계 인류가 다 전쟁을 그만둬서 군대가 다 없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그런 상상도 해본다.

위에서 언급했던 <여자, 노동을 말하다>(2013/05/09 - [내가 바라는 책읽기/바라는 삶을 위한 생각] - <여자, 노동을 말하다>, 박수정 - 책을 읽고.)를 쓰신 박수정 작가님께서도 술자리에 참석하셨다. 책 리뷰에도 썼지만, 책을 감명깊게 읽었기에, 예상치 못하게 작가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이 무척 영광이었다! 게다가, 선뜻 이메일 주소와 연락처도 주셨다. 아아, 행복해라. 일다 심포지엄, 진짜 가길 잘했다!

다음날 아침, 올 1월에 내일로여행때 들렀던 왱이 콩나물국밥집으로 해장을 하러 가시는데, 난 홍대에서 3시에 다른 독서모임에 참여해야해서 먼저 빠져나왔다. 함께하지 못해 몹시 아쉬웠다. 그렇지만 많은 분들을 만나고, 많은 이야기를 들어서 행복했다. 술자리에서 다들 좋으셨는지, 이런 모임 자주 하자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는데, 공감이다.

6월 29일에는 홍대에서 일다 10주년 후원호프가 있다. http://ildaro.com/bbs.html?Table=ins_bbs1&mode=view&uid=2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