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3~

좋은 관계

참참. 2023. 10. 19. 07:51

 

싸울 수 없다면 좋은 관계가 아니다. 싸우지 않는다고해서 다 안 좋은 관계인 건 아니지만, 싸우지 않는다는 것은 대개 싸울 수 없어서 싸우지 않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관계가 아니다. 싸울 수 없다는 것은 내 감정, 내 느낌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 중 한 사람만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말함에 있어서 자유롭거나 혹은 둘 다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내 감정이 곧 나이므로, 내 감정을 전할 수 없다면 나를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관계에서 내가 없는 것이다. 두 사람이 "있어야" 관계인데 둘 중 한사람이 없다면 좋은 관계일 리 없다. 

내가 내 느낌을 상대에게 말하기 어렵거나, 상대방이 이 관계에서 자기 느낌을 말하기 어려워한다면 왜 어려운지 잘 들여다볼 일이다. 더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느껴보는 연습이 필요할 수도 있고, 충분한 시간동안 보채지 않고 기다려주어야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그것을 꺼냈을 때 무시되거나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한번이라도 그렇게 될 경우 다시 꺼내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런 경험이 몇번만 반복되어도 그 관계에서 다시 꺼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진다고 볼 수 있다. 한번 틀어진 관계가 회복되기 어려운 이유다.

문제는 감정을 말하는 것도 잘 듣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평생동안 자신의 감정이나 느낌을 소중히 여기지 않아왔을 가능성이 높다. 학교에서는 늘 "정답"을 요구하고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드러내는 건 틀린 것으로 간주되며 틀리는 것은 말 그대로 옳지 않고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가족조차도 대부분의 경우 서로의 감정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수록 "어른스럽다"고 칭송 받는다. 즉, 많은 사람들이 평생 어떤 관계에서도 서로 감정이나 느낌을 드러내고 그에 대해 존중 받아본 기억이 없으며 그렇게 해본 적도 없다. 해보지 않으므로 감정을 얘기하는 건 낯선 일이고, 낯선 것은 어렵고 불편하다. 그러므로 자신이 감정을 느끼는 것도 말하는 것도 듣는 것도 잘 못한다면 타고나지 못해서가 아니다. 다른 능력이나 기술들과 마찬가지로 의식적으로 공부하고 노력하고 연습하며 훈련해야 해낼 수 있다.

나 역시 내 생각, 내 느낌만 마구 얘기하면서 그러는 줄도 모르는 채 상대방의 감정들을 무시했던 적도 있고, 관계가 끊어지고 상처 받고 후회하는 것이 두려워서 내 감정은 잘 인지하거나 얘기하지 못한 채로 상대방의 말이 옳다고 믿으며 나 자신을 지우려한 적도 있다. 지금도 역시 잠깐만 방심하면 내 잘못이 아닌 것까지 내 잘못으로 가져오려고 하거나, 상대방의 느낌을 옹호하느라 내 감정을 뒷전으로 두려고 하는 때가 있다. 반대로 내가 내 감정과 상태를 잘 알아차리지 못하고 엉뚱한 사람, 상황, 환경 탓으로 돌리는 경우도 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어떠한 것들은 제대로 된 사랑이 아닌지에 대해 한참 이야기한 뒤에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나는 극단적으로 객관을 신뢰하던 어린 시절을 지나 객관은 환상이라고 생각하는 어른이 되어왔다. 그런데 완벽한 객관이 존재할 수 없다고 해도, 결국 사람이 다 주관적일 수밖에 없고 주관적인 게 나쁜 것도 아니라고 해도, 그게 객관적이고자 하는 노력까지 의미없다는 뜻은 아닌 거 아닌가하고 생각하게 됐다. 중심을 잡는다, 균형을 잡아나간다라는 이미지를 떠올려보게 된다. 좋은 책이 얼마나 강력하게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지 새삼 실감했다. 그동안도 나름대로 책을 많이 읽는 시기와 읽지 않는 시기를 번갈아가며 거쳐왔고, 그래도 주변에서 책 많이 읽는 편이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는 책을 읽으며 살아왔으나 이렇게까지 실감한 적이 또 있었나 싶다.

그저께는 애인이 나에 대해 "온라인마케팅하기 쉬운 사람"이라고 평가를 했다. 그 평가가 굉장히 기분이 나빴고, 내 생각에는 명백히 부당한 평가였으며 그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으므로 다음날 아침에 출근하면서 그에 반박하는 정성스러운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저녁에 산책하면서 애인은 평가한 것, 그것을 입밖에 낸 것에 대해 사과하면서도 내가 그 평가를 반박한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을 마음대로 바꾸려 해서 짜증이 난다고 말했다. 굳이 자신의 평가에 대해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증명할 필요가 없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부당한 평가야말로 공격이 아닐까? 남이 나를 부당하게 평가했을 때 그것을 부정하고 반박하는 것은 나를 지키는 일이다. 그건 누군가를 조종하려는 일이 아니며, 오히려 부당한 평가를 하는 것이야말로 누군가를 조종하려는 일에 가깝다. 평가하는 것이 권력이다. 내 반박을 통해 상대방의 생각이 바뀌어 나에 대한 평가를 바꿔준다면 고맙겠지만, 어차피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그저 나를 지키려고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짜증은 날 수 있다. 짜증이 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반대로 애인이 짜증이 났다고해서 그게 내 잘못이 되는 것도 아니고, 반박한 내 행동이 잘못한 행동이 되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어느 쪽도 잘못한 사람, 잘못된 행동, 잘못되거나 나쁜 감정은 없다. 바로 여기에서, 이 순간에 객관을 유지하고 나를 지키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고 느꼈다. 이건 진짜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좋은 관계가 아니라면 여기까지 대화가 진행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 모든 맥락에 대해 서로 대화를 할 수 있었고 그래서 나는 이 관계가 좋은 관계라고 생각한다. 진짜 크게 싸웠을 때에 비하면 그제와 어제의 평가와 그에 대한 대화는 싸움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잘" 싸웠고 더 큰 싸움이 되기 전에 잘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는 나름 여러 크고 작은 싸움을 해왔는지도 모른다.

추석 연휴 즈음에는 교토 여행을 계기로 최근 몇달동안 제대로 잘 싸우지 못하고 쌓여왔던 것들이 아주 크게 터졌다. 4박 5일 여행 기간 거의 대부분이 치열한 싸움의 시간이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싸웠다. 그 당시에는 정말 힘들기도 했고 즐겁자고 돈 쓰고 시간 써서 큰 맘 먹고 여기까지 와서 왜 이러나하는 생각도 안 들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둘 다 실제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어제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진심으로 그 여행 덕분에 얻은 게 참 많다고 느꼈다. 크게 싸운 적이 몇번 있는데 그 중에서도 정말 크게 싸웠고, 그만큼 서로의 한계와 바닥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우리가 그동안 참 점잖게 만났다는 얘기도 웃으면서 할 수 있었다. 함께한 시간이 2년이 넘어가고 있다. 사실 내 인생에서 2년이 넘게 계속해서 대화가 잘 되는 좋은 연인관계를 유지해보는 것 자체가 처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삶이 늘 그렇긴 하지만,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길을 오늘도 한걸음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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