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0~2022

마지막이라면

참참. 2022. 6. 19. 22:11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다. 만약 그렇다면 난 무엇을 할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 <이프온리>에서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직감한 이안이 사만다에게 묻는다. 내일 죽는다면 오늘을 어떻게 보낼 거냐고. 사만다는 구두부터 산 다음 아이스크림을 퍼먹고 일류 속옷모델과 찐하게 연애를 하겠다고 농담을 던지고는 곧 이렇게 말한다.

"당연히 당신과 함께 보내야지. 지금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영화를 열번도 넘게 봤지만 그 마음만은 알듯 모를듯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오늘이 내 마지막 날이라고 해도 그저 같이 있고 싶은 관계는, 그런 마음은 어떤 걸까 늘 궁금했다. 뜨겁게 타오르던 갈망의 순간에는 그 사람이 날 사랑하기만 하면, 그 사람의 곁에만 있으면 행복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럴 때면 이런 게 그런 기분일까 싶었다. 그렇게 갈망하는 마음으로 연애도 하고 결혼도 했었다. 그러나 그런 기분은 언제나 금세 사라져버리곤 했다.

나라는 사람이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느낄 수가 없었다. 그동안의 모든 한때 좋았던 관계가 이어지지 않은 것이 내 탓인 것만 같았다. 그래서 사랑받는 데 자격이 필요하지 않다는 책 구절을 만날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밑줄을 그었다. 그러나 아무리 밑줄을 그어도 책을 덮으면 어느새 다시 사랑을 찾아헤매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사랑을 찾아헤매는 내가 싫었다. 타인이 주는 사랑과 관심이 그렇게나 필요하다는 게 내가 나약하고 잘못 살아왔다는 증거인 줄 알았다. 정혜신 선생님이 <당신이 옳다>에서 자동차가 연료없이 굴러갈 수 없듯이, 사람은 존재 자체에 대한 관심, 사랑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단언한 문장이 얼마나 위안이 됐는지 모른다.

작년부터 받기 시작한 심리상담이 어느새 30회기를 앞두고 있다. 반 년 넘게 상담을 받으면서 일상을 살아가는 마음이 꽤 많이 달라졌다. 아무리 좋은 책을 읽어도 끈질기게 따라붙던 내가 이상하고 내가 문제인 것만 같은 그 감각이 내려놓아졌다. 그걸 내려놓기 전에는 그런 걸 이고 지고 살고 있는 줄도 잘 몰랐다.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짐작한 것보다도 훨씬 더 나는 나 자신에게 가혹하게 굴어왔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내가 느꼈던 어떤 감정도 틀리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했던 행동이나 선택들도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는 진심 어린 공감과 인정을 통해 마침내 나 자신조차 나에게 공감할 수 있었다. 자기 자신의 감정을 공감해야한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정말로 그랬다. 그게 다른 그 누구에게 공감하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고 구체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여전히 매일같이 흔들리지만, 조금씩 조금씩 내가 그냥 나인 것으로 충분하다는 감각을 찾고 있다. 그리고 그의 곁에 있으면 느껴진다. 내가 그냥 나여도 충분하다는 것, 별일 없이 함께 하는 일상이 바로 행복이라는 것도. 우리도 함께 살게 되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또 어떻게 될지 불안해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하지만 그런 두렵고 불안한 마음도 함께 이야기해나갈 수 있어서 괜찮다. 삶의 마지막 날 가장 함께 있고 싶은 사람과 있는 것 외에 무엇을 바라겠냐는 사만다의 그 아리송하던 말이 이제는 퍽 당연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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