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0~2022

여름이 온다

참참. 2022. 6. 12. 20:47

 

여름이 온다. 이때를 대비해 진작부터 에어컨을 설치해두었더니 마음이 든든하다. 지난 10월 이사 올 때만 해도 이 집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미리 설치하지 않으면 5월부터 이미 예약이 밀려서 여름 다 지나고야 설치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흔하게 들었던 터라, 2월부터 부지런을 떨며 에어컨을 주문해 설치까지 완료했다. 비수기는 비수기였는지 에어컨을 판매하는 쇼핑몰도 아직 많지 않았고, 주문을 넣은 주 주말에 바로 와서 설치해주셨다.

오랫동안 에어컨은 사치품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을 보낸 시골집에서는 구경도 못해봤고, 찬 물 샤워와 선풍기만으로도 견딜 만했다. 여러 사람이 모여있는 교실에서 트는 것 정도는 이해할 만하지만, 가정집에 굳이 그런 무시무시한 물건이 꼭 필요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연비도 안 좋은 차를 매일 혼자 몰고 다니는 일처럼 약간의 편의를 위해 지나치게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서울에 살던 20대 중반까지만 해도 이 생각에 크게 변함이 없었는데, 귀촌해서 홍천에 살던 2018년에 완전히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역사에 남을 폭염이 왔던 해인데 그 중에서도 하필 홍천군은 40.6도라는 우리나라 기상관측 사상 최고기온을 경신한 곳이었다. 그리고 내가 살던 집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아무리 샤워를 하고 선풍기를 틀고 창문을 다 열어두어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1분 이상 집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졌다. 도저히 살 수가 없어 에어컨이 있는 카페로 피신을 하려해도 너무 시골이라 걸어갈 수 있는 카페가 없었다. 결국 에어컨이 있는 카페에 가기 위해 차를 타고 나가야했다.

에어컨을 사지 않는 것이 돈도 아끼고 에너지도 아끼는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며칠을 차를 타고 나가 카페를 배회하다보니 돈은 돈대로, 에너지는 에너지대로 쓰는 데다 불편하기까지 했다. 그 뒤부터 나는 에어컨을 냉장고, 세탁기와 다르지 않은 생활필수가전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젊고 딱히 아픈 곳도 없던 내가 그 정도였다면 그 더위를 더 견디기 어려웠던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너무 싼 전기요금은 전기를 낭비하게 만든다고 믿어왔는데, 당장 나부터도 전기세가 무서워서 에어컨을 못 틀게 될까봐 걱정하게 됐다.

여전히 환경문제와 기후위기를 걱정하고 에너지를 아껴야한다고 생각하지만 전보다는 많이 느슨해졌다. 이 악물고 그 더위를 견뎌낼 자신도 없는 데다, 환경을 걱정하는 게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원망스러울 것 같다. 그보다는 나 자신과 곁에 있는 사람에게 상냥할 수 있는 게 낫겠다. 누군가는 그래가지고 환경을 걱정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냐고 비난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는 그런 비난이야말로 환경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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