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질째 끓인 단호박 포타쥬.(채소의계절 반찬구독서비스)
매일 하는 간단한 아침 스트레칭을 마치고 샤워를 하고 냉장고를 열었다. 기대하고 있던 단호박 포타쥬를 꺼내어 꼭 닫힌 뚜껑을 땄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뻥- 소리. 작은 냄비에 절반을 덜고 물을 조금 넣어 약불에서 천천히 저으며 데웠다. 젓다보니 내가 직접 요리한 것이라도 되는 양 정성스러운 마음이 되었다.
사실 나는 "음미한다"라는 동사와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성격이 급하다. 지금의 아름다운 장면도 좋지만 그 다음의 전개가 더 궁금하다. 그래서 예전에는 잔잔한 일본영화나 드라마가 몹시 지루하게 느껴졌다. 일상을 살아갈 때도 이 다음에 할 일, 이 다음에 나아갈 단계에 시선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돌아보면 그게 없어졌(다고 생각했)을 때 자유로움과 허무와 무기력과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도 전보다는 덜 조급해하는 나를 볼 때 내가 달라졌다고 느낀다. 한편으로는 열여덟, 스무 살의 나와 하나도 변한 게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분명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또 달라질 것이다.
가치나 의미, 신념은 좀 내려놓고 즐거움, 성취감, 그리고 그냥 이대로도 괜찮다는 마음을 연습해야지하고 생각한다. 돈을 벌고 모으는 것에 대한 생각은 요즘 좀 넘치게 한 것 같다. 돈만 벌고 있는 거 아닌가, 뭘 위해서 벌고 있지 - 하는 마음이 종종 들 정도로.
최근 10년동안 혼자 먹은 아침 중에 가장 길고 여유롭게 느껴진 아침식사였다. 여전히 익숙하지 않지만 한 숟갈, 한 숟갈 음미하며 먹었다. 다 먹고 고개를 들었는데 문득 늘 후닥닥 아침을 해치우던 그 부엌이 아닌 어딘가 다른 공간 - 더 따뜻하고 부드러운 어딘가 - 에 도착한 듯한 묘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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