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혼은 내가 결정한 일인만큼 내 이혼에 대해 나만큼 오래, 많이 고민하고 나만큼 왜 그랬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절대 쉽게 결정한 일은 아니었다. 당연히, 쉽게 결정할 만한 일도 아니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큰 상처를 주는 일이었다.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선택한 것이다.
(그 사람은 너무 좋은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정말로 나쁜 사람이고 내게 못된 짓을 했다면 차라리 모든 게 더 받아들이기 쉬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반대로 내가 나쁜 사람이어서 이혼한 것처럼 생각이 됐다. 누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 그 생각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어째서 이혼을 하면 최소한 둘 중 한쪽에는 뭔가 문제가 있으니까 그런 일이 생겼다고 생각하게 된 걸까. 지금은 전혀 그런 식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그래도 받아들였다.)
내 생각에, 지금까지 고민해본 결과, 내 이혼의 본질은 그 사람과의 불화가 아니라 나 자신과의 불화에 있다. 그 사람이 날 아프게 한 게 아니라 내가 날 아프게 했다. 그 사람이 날 잘 돌봐주지 못한 게 아니라 내가 나를 잘 돌보지 않았다.
그 관계에서 나를 불편하게 했던 느낌 중 강렬한 하나는, "끌려다닌다는" 느낌이었다. 예를 들면 고양이를 두 마리 키우게 됐는데, 고양이를 키우기로 결정한 것은 그 사람이었다. 나는 처음엔 반대했지만 결국 동의했다. 고양이를 키우기로 결정한 것도 그 사람이었고, 언제 어떤 고양이를 키울지 결정한 것도 그 사람이었으며, 그 고양이를 두 마리로 늘리기로 한 것도 그 사람이었다. 두번째 고양이를 데려오는 날에는 나에게 상의조차 하지 않았었다. 집에 있었는데, 갑자기 와서 고양이 한마리를 집안에 던져놓고는 다시 나가버렸다. 나중에서야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고양이를 키우는 것에 대해 나도 동의를 하긴 했지만, 마음 한켠에는 "이 일을 결정한 최종결정권자는 그 사람이니까 이 일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도 그 사람에게 있어"라는 생각이 남아있었다. 그 고양이들은 많이 귀엽고 사랑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돈이 많이 들고 챙겨줄 게 많아서 이렇다할 수입이 없이 경제적으로 늘 쪼들린다고 느끼고 있던 나에겐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밖으로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해준 이후로는 갑자기 집안에 뱀 같은 걸 물어다놓음으로써 날 불안하게 했다. 그리고 내가 고양이를 돌볼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전국 어디든, 몇날 며칠이든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나는 대체로 아무곳에도 가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어디 가지 말라고 한 것은 전혀 아니다. 나를 감옥에 가둔 것도 아니고 나에게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거나 어떤 종류의 강제를 하지도 않았다. 그는 나에게 자유를 주고 싶어 했다. 돈도 없고 그럴 에너지도 없다는 생각 등으로 스스로를 제한하고 가둬둔 것은 언제나 나 자신이었다. 이런 마지못해 동의하는 결정은 서로에게 상처만 되기 쉬운데, 그러면서도 나는 "어쨌든 당신이 원하는대로 해줬잖아, 난 많이 양보한거야"라는 식으로 생각하게 되고야 말았다. 그게 결국에는 양쪽 다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그 결정들이 대단히 나에게 해가 되거나, 누가 봐도 아주 나쁜 그런 것들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그랬다면, 어쩌면 내가 큰소리를 내고 싸우든가 뭔가 잘못됐다는 걸 더 쉽게 알았을지도 모른다. 근데 그 사람도 따뜻한 사람이고 지구와 환경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과 다른 존재들을 배려하고 늘 그런 마음을 갖고 사는 사람이기에 어떤 결정이든 내 마음에 안 들거나 내가 진심으로 함께할 수 없을지언정 내가 반대할 명분이 없었고 내가 생각해도 올바른 결정이 많았다. 단지 그때는 제대로 깨닫지 못했지만 그것들을 내가 계속 진심으로, 혹은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을 뿐.)
아마 서로의 기억은 철저하게 다르겠지만, 내 기억 속에서 나는 그 관계의 아주 많은 결정들이 그런 식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다 기억할 수도 없고 언급하기도 민망할 정도의 사소한 선택들부터 꽤 큰 것들에 이르기까지.
(이혼하면서 짐을 나눌 때, 그가 내게 '가장 좋아하는 컵과 가장 좋아하는 그릇을 하나씩 골라서 가져가라'고 했는데, "정말 그래도 돼?"라고 나도 모르게 몇번이나, 몇번이나 되물었었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컵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릇이 뭔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늘 그 사람이 가장 맘에 드는 걸 고르고 남는 걸 내가 썼으니까. 애초에 그 예쁜 컵과 그릇들을 골라서 사온 것도 그 사람이었고 그 사람이 고르고 남은 것조차 내게는 충분히 예쁜 것들이었으니까.
몹시 어색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내맘대로 골라도 된다고 하는 상황이 너무나 낯설었다. 내가 좋아하는 걸 그토록 고민해보지 못했다는 게, 난 이게 좋으니까 내가 이걸 쓸래라고 한번도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다는 게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그 기억을 돌이켜보며 글을 쓰는 지금도 이렇게 눈물이 나는 이유는, 아마 내가 나를 그렇게 막 대했다는 게, 나 자신에게 너무 미안해서 그런 거겠지. 그러고 있는 줄도 모르고, 계속 그렇게 살았다는 게. 뭐가 날 행복하게 하는지 고민해볼 생각조차 없이.)
나는 일상의 많은 순간에
"그래, 당신이 하고싶은 대로 해. 대신 당신이 선택한 거니까 나는 가능한 만큼 도와주긴 하겠지만, 그건 결국 내 일은 아니야."
라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단순한 친구나 결혼하지 않은 연인이었다면 진심으로 '응원'하고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결정한 일들이 두 사람 모두의 일상과 삶에, 행복에 깊이 관계된 일이라면 이런 식으로는 곤란하다.
근데 그렇게 살고있는 나를 내가 내버려뒀다. 나는 나 자신에게 더 간절하게 물어봤어야 했다. 너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일은 뭐냐고, 정말 괜찮냐고, 정말 이걸로 너도 행복한 것 맞냐고. 그땐 예전에 하고싶다고 생각했던 것들, 추구하던 것들(결혼이라든가 귀촌이라든가)에 도착한 상태였기 때문에 정말 떠오르는 게 없기도 했고, 어떤 이유에선지 아직도 확실히 모르겠지만 많이 지쳐있었던 것 같다.
계속 도망쳤다.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들과 정확히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행복하지 않은 일상과 점점 더 통하지 않는 대화와 어딘지 모르게 망가져가고 있는 관계를. 사실 그런 줄도 몰랐다. 제대로 깨닫지조차 못했다. 내가 행복하지 않다는 것도, 관계가 망가져가고 있다는 것도. 괜찮다고, 원래 결혼이 그런 거고, 원래 항상 행복할 수는 없다고 그냥 그런 식으로 뭉개면서 자신조차 속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야 알 수 있는 거지만 내가 그렇게 "끌려다닌다"고 느꼈던 것은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그때는 "그쪽이 날 끌고 가니까 어쩔 수 없잖아"라는 식으로 느꼈던 것 같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 사람은 그냥 자기가 하고싶은 걸 했고, 그걸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길 원했던 것뿐이다. 물론 그때도 머리론 알았지만 마음은 자꾸만 내가 끌려가고 있다고 느꼈다.
대체 왜 그렇게 느끼는지 몰랐다. 솔직히 아직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그 느낌을 적당히 무시하지 말고 더 열심히 더 잘 들여다봤어야했다는 것만은 알겠다. 그렇지만 아마 그때의 내게는 그럴 힘이 없었던 거겠지. 아마 그때의 나는 그게 최선이었을 거야.
그가 행복하다면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라도 행복하다면. 그를 실망시키는 것보다는 나를 배신하는 게 더 쉬웠다. 그게 더 편했다. 둘 다 완벽하게 좋고 모두를 만족시키는 결정이 불가능하다면, 나보다 훨씬 확고하게 자기가 하고싶은 게 뭔지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쪽의 결정에 따르고 내가 포기하는 쪽이 나도 더 고민하지 않고 편할 수 있고, 결국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결국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나는 내가 어떨 때 기쁨, 즐거움, 행복감, 만족감, 안정감 등을 느끼는지 제대로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고, 그러므로 같이 살고 있던 사람도 나에게 어떻게 해줘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내게 말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알겠냐고, 답답해했다. 나는 말을 하면 듣기나 하냐고 생각했고, 실은 아무 할 말도 떠오르지도 않았다, 왜냐면 나도 내가 뭘 원하는지 전혀 몰랐고 그걸 어떻게 해야 알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중이었으니까.
그와 내가 함께 살기엔, 결혼생활을 지속하기엔 서로 잘 맞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는 게 참 쉽지 않았고, 그 관계는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도 그랬다. 어려웠지만 이젠 안다. 핵심은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할 줄 몰랐고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그게 다 내 잘못이고 나만 잘했으면 된다는 식으로 모든 탓을 다시 나에게 돌리는 건 아니다. 그때의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 상황과 그 타이밍에 그런 상태에 있는 나와 그 사람이 만난 거고, 그게 잘못된 건 아니다. 그 덕에 서로 얻을 걸 얻고 배울 건 배우고, 그 사람 덕분에 나도 로망으로 간직하던 귀촌 등 여러가지를 해볼 수 있었고, 나와 맞는 것, 안 맞는 것들을 여러가지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 우울과 무기력에 빠져드는지도 이전까지는 적당히 눈 감고 다음 목표, 다음 열정을 찾아다니느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데, 이젠 조금은 알 수 있다. 나 자신을 잘 돌보는 게 내 삶뿐만 아니라 건강한 관계, 나와 관계맺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얼마나 중요한지도. 그 결혼생활이 아니었으면 진짜로 배우기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퍽이나 포기가 빠른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나의 치명적인 단점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쉽게 포기하고 늘 도망쳐다니는 것만 같은 나 자신을 자주 비난했었다.
근데 그냥 안 맞았던 거다. 어쩔 수 없다. 관계라는 것도 옷과 비슷한 거 아닐까. 아무리 눈으로 열심히 봐도 결국 맞는지 안 맞는지는 입어봐야 알 수 있다. 눈썰미가 좋아서 척 입으니까 딱 맞으면 좋겠지만, 막상 입어봤는데 불편하다면 어쩔 수 없다, 빨리 벗으면 된다. 미련이 나쁜 건 아니다. 옷이 예뻐서, 그 옷에 내가 잘 맞았으면 좋겠어서 아쉬울 순 있다. 그치만 그런 옷을 잠깐 입고 버틸 수 있을진 몰라도, 오래 입고있을 순 없다. 혹은 처음엔 분명 잘 맞았는데 옷이 망가질 수도 있고, 내가 달라질 수도 있다. 그럼 그때라도 벗어야한다. 여태까지 잘 입고 있던 옷인데, 라는 생각에 아까울 수도 있겠지만 어쩌겠어. 아마 옷을 수선한다거나 여러모로 노력도 해보겠지만, 그래서 해결이 되면 좋지만, 세상에 수선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경우도 많으니까.
지하철을 잘못 탔다는 걸 깨달았다면 아무리 그 지하철이 쾌적해도, 아무리 이미 멀리 왔어도, 알게 된 시점에서 얼른 내려야한다. 근데 그러려면 내 목적지가 어딘지 알아야하고 여기가 어딘지 알아야한다. 가끔은 목적지가 딱히 없다면 어디로 가든 적당히 즐겨도 된다. 그러나 "잘못된" 곳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있다면, 더 이상 즐길 수 없다면 이미 글렀다. 내리고나서 어디로 가야할지 아직은 알 수 없다고 해도, 더 멀리 이상한 데로 가버리기 전에 일단 내려서 생각 좀 해보는 것도 방법이다. 어쩌겠어,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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