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에 주의하세요. 기억하고픈 좋은 내용이 너무 많아서 이러다간 책을 다 옮겨적고 말겠구나, 싶네요.
나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소리 없는 강요에 눈떴다. 가장의 역할을 군말 없이 떠안게 만든 '장녀'라는 수식어 또한 얼마나 부당하게 사용될 수 있는지 알아차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누구도 내 인생을 가져갈 권리는 없어. 만약에 시간과 자원을 가족과 나눠야 한다면 의무가 아닌 선택이어야 해.
"그래도 낳아주고, 길러주셨잖아. 고마움에 보답해야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나도 그랬으니까. 내 새끼는 죽어도 내가 지킨다고 다짐하던 엄마를 기억한다. 때가 되면 밥을 지어 먹이고, 흠 잡히지 말라고 깔끔한 옷을 골라 입혔다. 집에서 따끔하게 혼을 내다가도, 밖에 나가면 자식 자랑을 늘어놨다. 서툴고 거칠었지만 사랑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착한 딸이 되려고 애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마움은 수많은 감정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사랑하다가 미워하고, 기뻐하다가 슬퍼한다. 고마움이라는 단 하나의 감정이 수천, 수만 갈래의 감정을 상쇄하진 못한다. 고마움은 고마움대로, 미움은 미움대로 존재한다. 고마움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베풀어준 은혜에 대하여 마음이 흐뭇하고 즐거운 상태.'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고마워서 미안하고, 고마워서 괴롭다. 갚을 수 없는 부채감에 허덕이다가 피하고 멀리한다. 도대체 사랑은 어디에 있을까?
"어릴 때 받은 거 다 갚았어. 이제 남은 빚은 없어."
이렇게 말했을 때 엄마의 표정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기가 차고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혀버린 얼굴. 하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알고 있으니까, 온 마음을 다해 가족을 위해 살았다는 걸. 이것 역시 사랑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를 위해 꼭 말해주고 싶었다. 이제, 그만하면 됐다고……
- 42쪽
"그래요 늘 남편이 문제였어요. 얘기했잖아요. 자기만 알고, 이기적인데다가 똥고집, 아우, 그런 똥고집이 또 없다고. 결국 이혼이 답이구나 싶었는데…… 자꾸 기대하니까 실망할 수밖에 없겠더라고요. '너한테 뭔가 기대하느니, 내가 나를 사랑하겠어.' 이렇게 마음먹었죠. 남편이 거들먹거리면서 제 탓을 해도, '네가 이해 못하는 거, 어쩔 수 없지. 근데 누가 뭐래도 나는 내 편이다!' 이렇게요. 근데 그러고 나니까 평소 같으면 크게 붙을 일도 그냥 넘기게 되더라고요. 나 스스로 괜찮다고 하는데 문제될 게 뭐 있겠어요."
"남편도 확 달라진 걸 느꼈겠네요."
"모를 수가 없었을걸요. 제가 짜증내던 게 확 줄었으니까. '그 인간하고 싸울 시간에 나를 위해 좋아하는 일을 하자.' 속은 뒤집어지는데 부들부들 떨면서 다짐했어요. 혼자 바람도 쐴 겸 카페에 가서 커피도 마시고, 책도 읽고, 생전 쓰지 않던 일기도 끼적거렸죠. 그런데 언제부턴가 저한테 밥은 먹고 일하느냐며 살갑게 챙기질 않나, 외식하러 나가자고 하질 않나, 어제는 같이 심야 영화도 봤어요. 그냥 남편한테 신경 끄고 저한테 집중한 것밖에는 없거든요. 이혼을 하느니 마느니 난리를 피울 땐 꿈쩍도 안 하던 똥고집이 이렇게 변할 줄은 몰랐죠. 요즘 제가 화도 덜 내고 짜증도 안 부려서 예뻐보인다나 뭐라나. 뭐, 남편 좋으라고 한 건 아닌데 괜히 신혼 때 기분도 생각나고 그래요."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미간에 잔뜩 힘을 주고 남편을 신랄하게 헐뜯지 않았던가! 사랑의 힘을 회복한 사람이 보이는 변화는 놀라웠다. 얼굴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며, 주변을 밝고 선명한 색으로 물들였다. 웃지 않아도 즐거워 보였는데,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 앞에선 누구도 먼저 화낼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녀만이 아니었다. 모임이 거듭될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여과 없이 쏟아냈다.
"내가 소중한 존재란 걸 알게 됐어요."
"누가 뭐래도 내 편이 되어주겠다고 약속했어요. 진심으로."
"오랫동안 꽁꽁 감춰왔던 아픔까지 진심으로 안아줬어요."
"정말 나밖에 없더라고요."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런 나를 어떻게 사랑하라고? 아직 모자란 것투성이인데' 하며 마음을 열지 않았다. '비교하고, 자책하고, 미워하는 습관이 하루아침에 바뀔 리 있겠어?' 곁눈질하며 의심했다. 하지만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다. 자기 사랑이라는 이 낯선 사랑이 그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어려움을 헤쳐나갈 힘을 주고, 소중한 관계를 더욱 끈끈하게 만들어주는 것을.
이 모든 증거들이 입을 모아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너 자신을 사랑해도 괜찮아." 사람들이 보여준 간절하면서도 꾸밈없는 변화 앞에서 단단하게 굳어 있던 내 마음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 84쪽
"스스로 만든 생각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걸 멈추는 것 역시 사랑이에요."
그 말을 들은 그녀는 엄지와 검지로 안경다리를 매만지면서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더는 저를 괴롭히고 싶지 않네요. 무섭다는 생각이 들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서 '뭐가 무섭지? 정말 무서운 상황인가?'하고 확인해 볼래요. 사실…… 여태껏 시도도 해보지 않았어요. 서둘러 다른 데로 주의를 돌렸거든요. TV를 본다거나, 약속을 잡아서 밖으로 나간다거나. 그래서 더 무서웠는지도 몰라요. 계속 도망만 쳤으니까요."
"자기 생각을 확인하는 건 중요해요. 생각이 막연할수록 두려움도 커지잖아요. 생각을 확인하는 습관을 들이면 '내가 왜 이런 걸로 두려워하고 있지?' 하면서 툭툭 털어버리는 날이 올 거예요."
그녀가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나도 그날부터 생각을 확인하는 연습을 시작했다. 방법은 단순했다. 마음이 불편하거나, 덜컥 겁이 날 때 '지금 무엇을 느끼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하고 스스로 물어보는 것이다. 생각이 복잡해서 정리가 안 될 땐 노트에 적어보면서 확인했다. 그러면 '저 사람은 날 싫어해' '이건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거야' '나는 정말 한심해' 등등 듣기만 해도 힘이 쭉 빠지는 생각들이 내 안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 생각들을 낱낱이 파헤쳐보면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믿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상대방의 마음을 내가 무슨 수로 알 수 있을까? "저를 싫어하세요?" 하고 직접 물어보기 전까지는 근거없는 추측에 불과했다. 일의 가능성 역시 직접 해보지 않고는 모를 일 아닌가. 스스로 한심하게 생각하면서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길 바라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비록 부족한 부분이 있더라도, 잘된 점에 초점을 맞추고 노력하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이었다.
지금까지 스스로를 괴롭히는 생각들에 눈이 가려서, 아름다운 것을 보지 못하고, 빛나는 것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할 때도 많았을 것이다. 몸을 살뜰하게 돌보고 마음의 상처를 보듬는 것만이 사랑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어떤 생각을 품고 사는지 확인하고 조사하는 것도 자신을 자유롭게 해주는 사랑임을 알게 되었다.
- 90쪽
나에게 상처 주는 말을 멈추기로 했다
몇 번이고 다짐했다.
"나는 나를 사랑할 거야"
하지만 다음날 아침이 되면 '왜 이렇게 칠칠치 못해!' 하고 나를 쏘아붙였다. 티셔츠에 커피 몇 방울 흘렸다는 이유로…… 이렇게 사소한 일에도 자신을 비난하는 것 역시 오래된 습관이었다.
길에서 모르는 사람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도 앞을 똑바로 보지 못한 내 탓이었다. 회사에서 일이 조금만 늦어지면 '이거밖에 안 돼? 더 서둘러야지?' 하며 자신을 꾸짖었다. '지금 버는 돈으로 어떻게 먹고살려고? 내 능력은 여기까진가 봐.' 날 선 비난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날이면 몸도 마음도 녹초가 되었다.
한번은 이런 상상을 했다. 어떤 사람을 종일 쫓아다니면서 귓가에 대고 비난과 악담을 퍼부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마 하루도 못 참을걸. 경찰한테 신고할지도 몰라. 어찌됐든 그것은 남에게 해서는 안 될 행도이었다. 그리고 나에게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내 안에서 들려오는 비난의 목소리에 귀를 바짝 갖다 댔다. 스스로를 상처 주는 수없이 많은 말들이 들려왔다. 지긋지긋하게 삶을 뒤흔드는 목소리, 자신을 실패자로 몰아붙이는 목소리…… 딱 일주일만이라도 목소리에 맞서 싸우고 싶었다. 내가 가진 무기는 '물음표'였다. 나는 비난보다 더 집요하게 물음표를 달기 시작했다.
'커피 몇 방울 흘린 게 날 미워할 일일까? 사소한 실수이고, 커피 자국은 지우면 그만이잖아. 행여 얼룩이 남더라도 세탁하면 깨끗이 사라질 텐데.'
'저 사람하고 부딪친 게 날 탓할 일이야? 복잡한 출근길에서 우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 그럼, 길에 사람이 많은 것도 내 탓이겠네?'
'정말 내가 게으름을 피웠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살인적인 스케줄을 칼같이 지켰다고. 이건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야!'
물음표는 비난을 멈추게 했고, 상황을 새롭게 보게 했으며, 나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그리고 대부분 뚜렷한 이유가 있지 않은, 오래된 습관일 뿐이라는 것도 곧 알아차렸다. 날마다 물음표를 촘촘하게 엮어 그물을 만들고, 일상 곳곳에 파고든 비난을 억척스러운 어부처럼 건져 올렸다. 하루가 끝날 무렵이면 만선이 되어 돌아왔고, 나는 정성을 들여서 그물에 걸린 비난들을 솎아냈다. 일주일이 지나자 나는 이 모든 과정까지도 사랑하게 됐다. 기꺼이 시간을 냈고, 정신을 집중했다. 나를 위해서라면 이 모든 노력이 아깝지 않았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자신과 수많은 말들을 주고받는다. 마치 또 한 명의 내가 있는 것처럼. 하지만 모두 의식하고 살면 피곤하니까 들어도 못 들은 척, 그렇게 사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소리 없는 말들이 끼치는 영향은 매우 강력하다. 스스로 버려져도 되는 쓰레기 같은 존재로 몰아붙이는가 하면, 어떤 날에는 구름이라도 뚫고 올라갈 것처럼 치켜세운다.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다니. '나'에게 조금 더 상냥하고 사려 깊게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 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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