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했던 2막 끝 마지막 대사는 절대 잊지 못했다. 아내가 떠나고 싶다고, 이 결혼에서 충족감을 느낄 수 없다고, 분명 더 나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선언하자, 남편이 하는 말이다.
세스 하지만 이해 못 하겠어, 에이미? 당신은 틀렸어. 모든 걸 다 주는 관계는 없어. '어떤' 것들만 주는 거라고. 누군가에게서 바라는 것들을 다―예를 들어, 성적으로 잘 맞는다거나 대화가 잘 통한다거나 경제적 지원이라거나 지적 관심사가 잘 맞는다거나, 상냥하다거나, 충실하다거나―생각해보고 그중 세 개만 택해야 하는거야. '세 개', 바로 그거야. 아주 운이 좋으면 어쩌면 네 개를 가질 수도 있겠지. 나머지는 딴 데서 찾을 수밖에 없어. 원하는 걸 다 주는 사람을 찾는 건 영화 속에서나 있는 일이야. 하지만 이건 영화가 아니잖아. 현실세계에서는 남은 인생에서 그중 어떤 세 가지를 가지고 살고 싶은지를 파악하고, 그걸 가진 사람을 찾아야 하는 거야. 그게 진짜 인생이라고. 그게 함정인 걸 모르겠어? 계속 모든 걸 다 찾으려 하다가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게 될 거야.
에이미 (울면서) 그래서 당신은 뭘 골랐는데?
세스 모르겠어. (소리) 모르겠어.
그 당시 그는 이 말을 믿지 않았다. 그때는 정말로 모든 게 가능해 보였다. 그는 스물셋이었고, 다들 젊고 매력적이고 똑똑하고 멋졌다. 모두들 몇십 년 동안, 평생 친구로 지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고 싶거나 데이트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바라는 것들이 같이 살고 싶거나 같이 있고 싶거나 묵묵히 함께 견디고 싶은 사람에게서 원하는 바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똑똑하다면, 운이 좋다면, 이걸 깨닫고 받아들인다. 자기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뭔지 파악하고, 그걸 찾아다니고, 현실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 다른 선택을 했다. 로먼은 미모, 상냥함, 나긋나긋함을 선택했다. 맬컴은 신뢰도, 능력(소피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능률적이었다), 미학적 양립성을 선택한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그는 우정을 선택했다. 대화, 친절, 지성.
<리틀라이프>, 한야 야나기하라
나의 '세 개'는 뭘까. 예전에는 그냥 좋아한다는 마음이면 충분했는데, 갈수록 겁만 많아지고 있다. 좋아한다고 해도, 관계가 변화하면 감정도 변화하고 수많은 것들이 서로 잘 맞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나아가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걸 겪다보니. 어떤 점이 나랑 잘 안 맞을지가 자꾸 보인다.
요즘 내가 일상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와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은 내가 스무 살 이후 주로 관계맺어왔던 사람들과는 정말 많이 다른 사람들이다. 특히 지난 7년간 관계맺어온 사람들과는 더더욱. 이를테면, 그동안 내가 가깝게 지냈던 많은 사람들은 적어도 1년에 5권 이상의 책을 읽지만 항상 자신은 책을 별로 많이 읽는 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이라는 느낌이다. 반면 여기서 만나는 사람들은 업무/기술/재테크 등의 실용서적을 제외하면 1년에 책 1권을 읽는 것도 상상하기 어렵고 그것에 대해 딱히 별 생각도 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라는 느낌이랄까.
어쩌면 이쪽이 주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놀 것도 많고 볼 것도 많은 시대다. 책이라니, 그런 걸 누가 볼까 싶은 기분이 들 때조차 있다. 책을 안 읽는 게 무슨 문제라는 건 아니지만 내가 속해 있는 세계가 바뀐 것 같은 이질감이 아직도 다 없어지지 않았다. 매일 옆에서 주식, 비트코인, 부동산 얘기를 듣고 있으면 그런 걸 하지 않는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느끼지 않는 게 더 어렵다. 아마 이 사람들은 채식주의자 같은 건 TV에서나 봤을 거다. 셰어하우스에 산다고 했을 때도 예외없이 모두가 처음 본다며 신기해했다.
그때도 분명 내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런 사람들이 전체로 보면 한줌밖에 안되는 특이한 사람들이라고 분명 자각하고 있었는데 다른 평범한(?) 세계에 떨어져보니 더 실감이 난다. 어쩌면 그동안 내가 '세 개'를 훨씬 넘는 많은 걸 바라왔던 걸까. 나의 포기할 수 없는 세 가지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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