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라는 만남

후배 D

참참. 2020. 2. 11. 13:31

 

옛날에 동아리활동을 잠깐 같이 했던 후배 D를 7년만에 만났다. 나는 학교를 졸업하지 않았으니 선배라고 하기도 애매하지만 여튼 당시엔 선배였다. 학교를 그만두고나서는 연락할 일이 딱히 없다보니 자연스럽게 오랜 시간 만날 수도 없었는데 그나마 페이스북 친구로 이어져있어서 소식을 조금씩은 전해듣고 있었다. 그러다 불면의 밤에 올린 그의 글에 댓글을 달기도 하고, 비슷한 시기에 둘 다 이별의 아픔을 겪는 등 묘한 친밀감이 형성되면서 7년만에 그와 따로 만나는 일까지 생겼다.

혹여나 너무 오랜만이라 어색하진 않을까했는데,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어색할 틈도 없었다. D가 중고나라에서 전자제품 거래를 하면서 날 만나러 오다가 그만 사기를 당하고 만 것이다. 상대방은 오류가 났다는 둥 그럴 듯한 말을 하면서 돈을 더 보내라는 얘길 반복했고, 안전거래 시스템까지 이용하고 있었던 데다 중고나라 경험이 많지 않아 방심했던 후배가 거기에 그만 낚여버렸던 것이다. 200만원을 입금하고나서야 뭔가 이상함을 깨달은 D는 상대방의 계좌번호를 웹에 검색했고, 이미 사기로 6번이나 보고된 적 있는 계좌라는 걸 알아냈다. 당했다는 걸 알고 사기인 거 다 아니까 경찰서 가기 전에 돈을 돌려달라고 했지만, 이미 닳을 대로 닳은 사기꾼은 당당하게 경찰서 가라고 했다고 한다.

법도 문제가 있는 게, 이런 사기 사건이 발생했을 경우 사기를 당한 사람이 은행에서 서류 다 떼고, 사기당한 자료 다 가지고 경찰서까지 가면 경찰서에서는 합의하고 돈 돌려받으라고 한단다. 그럼 사기꾼은 그냥 원래 자기 돈도 아니었던 돈만 돌려주면 끝, 사기를 시도한 것에 대한 어떤 처벌이나 손해도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사기 열심히 치라고 독려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 아닌가? 귀찮아서 경찰서까지 안 가고 그냥 돈 버리는 사람들 만나면 사기꾼은 누워서 떡 먹기로 돈 버는 것이고, 혹시나 경찰서까지 가는 사람이 나타나도 아무런 손해가 없으니. 이미 6번이나 신고 당한 계좌로 뻔뻔하게 사기치고 있는 것에서부터 나타나지 않나? 손해볼 일은 절대 없고 손쉽게 일 안하고 돈 벌 가능성은 열려있는데 이러니 온갖 문자 사기, 전화 사기가 판치는 것 아닌가 말이다. 오히려 당한 사람한테 왜 그렇게 바보같냐고 하는 멍청한 문화는 덤이다.

통장에서 200만원을 증발시키고 멘탈도 같이 증발시킨 채로 나타난 D와 그래도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미리부터 정해둔 식당엘 갔다. 식당의 오픈 시간은 지나있었고, 분명 휴무일도 아니었는데 어떤 공지문도 없이 문이 잠겨있었다. 혹시나해서 인스타그램까지 확인했지만 거기에도 역시 어떤 공지도 없었다. D를 달래가며 근처에 아는 다른 괜찮은 식당으로 갔는데 거기는 그 날부터 내부공사를 시작해 문을 닫는다는 큼지막한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그쯤 되니 둘 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왔다. 우린 미친 놈처럼 웃으며 아무 방향으로나 걸었다. 만나면 안 되는 운명이었던 것 아니냐며.

일단 다른 식당을 찾는 동안 근처 은행에 들어가서 D는 신고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했다. 나는 동네에 오래 산 하우스메이트에게 전화해서 식당을 알아봤다. 영 아쉬운 식당만 선택지에 남아서 아쉬워하다 문득, 처음에 갔던 식당이 그냥 조금 늦게 문을 연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스쳤다. 확인을 위해 그 식당에 전화를 걸었더니 사장님이 전화를 받으셨다! 아까 안 열려있던데 혹시 오늘 문을 여시냐고 했더니 죄송하다며 시장에 다녀오다가 조금 늦게 오픈했다고 하셨다. 죽으란 법은 없는지 D도 그럭저럭 서류를 뽑을 수 있었고, 우린 처음 가려던 식당에 가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최근 너무 고기만 먹어서 고기에 물렸다는 D가 슴슴하면서도 맛있다며 음식을 맘에 들어했다. 그래, 이 와중에 밥이라도 맛있어야지. 

난 예전에 구독 권유 전화를 못 끊어서 두 시간 넘게 통화하다 결국 1년치 구독권을 사고야 말았던 사건, 고등학교 친구한테 연락 와서 갔더니 대순진리회 권유였는데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지 못해서 5시간 넘게 잡혀있었던 사건들을 얘기해줬다. 그 뒤로 다른 고등학교 친구들이 나한테 호구와트 장학생이라고 놀린다고 했더니 D도 빵 터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린 그동안 겪은 각자의 연애경험에 대해 길게, 길게 이야기 나눴다. 그 사람이 생각 나서 초콜릿은 못 먹겠다던 D의 말에 나도 여전히 별것도 아닌 계란후라이와 김을 먹을 때마다 생각하곤 하는 그 옛날의 첫사랑을 떠올렸다. 

우린 슬퍼하다가, 덧없어하다가, 안타까워하다가, 어이없어하다가 하며 함께 웃었다. 식당에서 디저트로 시킨 두부티라미수의 두부스러우면서도 티라미수 느낌이 나는 맛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D와 독특한 분위기의 뮤지엄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음료는 그냥 적당히 만드는 것 같지만 뮤지엄이라는 공간이 주는 느낌이 좋은,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쬐는 그곳에서 우린 그동안 읽은 소설과 영화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애초에 책 같이 읽는 모임을 하다 만난 사이였지만 새삼 이렇게 많은 책을 읽고 영화도 진짜 많이 보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그런 사람과 대화를 나누니 대화 주제가 마를 일이 없었다. 장류진 작가와 김초엽 작가에 대해 이야기하다 결국 집에까지 데려가서 배명훈 작가와 김보영 작가의 책을 빌려줬다.

내 방에 들어오자마자 넓다며 부러워하던 D. 그가 사는 곳은 대기업 기숙사 1인 1실인데 내 방의 반도 안 되는 고시원같은 곳이라고 했다. 3교대 근무인데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해야한다며 먼 길을 떠나가는 그를 택시에 태워 보내고는 못 다 나눈 이야기가 아쉬워 카톡까지 주고 받았다. 걷는 걸 좋아해서 올해는 올레길을 걷고 싶고, 언젠가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싶다는 말이 계속 마음에 남는다. 그동안 나름대로 많은 친구들을 만들었는데 내가 정말로 필요할 때 누가 곁에 있어줄까를 생각하면 그런 사람이 있나 싶어서 자신이 없어진다는 말과, 그러다 마지막에서야 가족을 떠올리고 요즘 가족들에게 전보다 자주 연락하고 지낸다는 이야기가 나와 별로 다르지 않아서, 우리가 앞으로도 이렇게 이어져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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