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라는 글쓰기/귀농귀촌 이야기

땅끝에서 받은 위로

참참. 2018. 4. 2. 16:17

땅끝에서 받은 위로

 

자연농 배우는 참참

 

유랑농악단 전수를 다녀온 해남으로 다시 한 번 향했다. 정월대보름을 맞아서였다. 처음 들른 곳은 송지면 동현마을. 동현마을에서는 매년 정월대보름이 되면 헌식굿을 한다. 바다에서 죽은 이들의 영혼을 달래고 풍어와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의 큰 행사다. 나는 여태 휴일을 3일이나 주는 설날과 한가위만 명절로 알고 살았는데 예부터 우리 농어촌에서 가장 큰 명절은 정월대보름이었다고 한다. 어느 하루가 아니라 아예 음력 11일인 설날부터 15일인 정월대보름까지는 한해의 농사를 대비해 마음과 몸을 다스리는 기간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보름 하루 전날인 31, 동현마을의 헌식굿은 이랬다. 먼저 영기를 든 사람들과 군고패(풍물패)가 마을에서 지신밟기를 하고 계속해서 군고를 치며 바닷가로 간다. 바다 앞 모래사장에는 마을 분들이 각 집별로 준비한 헌식다라이가 차려져있다. 우리 유랑농악단도 각자 집에서 나물 한 가지씩 해오고 과일도 가져오고 과자도 사와서 한 다라이를 차렸다. 마을 군고패가 가락으로 한바탕 인사를 드리고 나면 집집마다 가득 차린 음식들을 종류별로 조금씩 떼어 잡귀, 잡신을 먹이기 위해 모래사장에 지푸라기를 깔고 그 위에 둔다. 이 음식들은 나중에 밀물 때 들어오는 바닷물에 쓸려나간다. 이 과정을 마치면 모인 사람들이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헌식다라이에는 별의별 음식이 다 나왔다. 헌식굿 대표음식인 찰밥에 김을 싸서 주는 해우밥에 제사상에 빠질 수 없는 시금치과 고사리 등 나물들, 따뜻한 국을 준비하신 분도 있고 떡과 각종 무침과 튀김들도 많았다. 가장 독특한 것으로는 벌 튀김이 있었다. 말벌인지 크기도 꽤 큰 튀김이었는데 다들 뭔지도 모르고 먹다가 벌이라고 해서 어찌나 놀랐던지. 올해 상을 차린 집은 일고여덟 집 정도였는데 한 해가 다르게 참여하는 집 수가 줄고 있다고 한다. 유랑농악단이 삼사년 전 와보았을 때만 해도 스무 집이 넘었다고 하는데, 이제는 동현마을 오십 여 가구 중에 열 가구도 채 다라이를 차려내지 못하는 것이다. 몇 번 왔던 이들은 다들 아쉬워했다. 해마다 줄어가는 게 안타깝다고.

그렇게 줄어들었다곤 하지만 그 광경을 처음 본 내게는 여전히 어떤 감동을 줬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그 쌀쌀한 바람이 부는 바닷가에 집집마다 상을 차린다니, 아는 사람의 장례식도 바빠서 못 간다는 세상에 그 먼 땅끝에서 오래도록 전해오는 그 위로를 보고 있자니 코끝이 찡해지는 거다. 그러면서 정성스럽게 차려온 음식들을 이 집 음식, 저 집 음식 돌아다니면서 나누어 먹는데 음식은 또 어찌나 맛있던지.

전에는 동현마을 헌식굿에서 유랑농악단도 가락을 쳤었다고 하는데, 주민분들께서 직접 배워 마을의 힘만으로 하고 싶다는 의지가 강하셔서 이제는 그렇게 하게 됐다. 그것도 참 멋지다. 그나마 남아있다는 그곳에서조차 이젠 없어져가는 문화인데 계속 지켜가고자 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다만 그분들도 나이가 적지 않으셔서 언제까지 이걸 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또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북도 잘 치시는 마을 아짐들이 다들 음식 차리느라 악기를 못 친다는 거였다. 남성들 몇몇만 가락을 치니 수도 너무 적고 아쉬웠다. 여성만 음식을 차리지 않는다면, 실력 있는 아짐들이 함께 헌식굿에서 군고가락을 칠 수 있다면 헌식굿이 더 풍성해질 수 있을 텐데.

동현마을 헌식굿이 끝나고 산정마을 헌식굿을 하러 갔다. 산정마을 헌식굿은 그날 저녁 마을을 한바퀴 돌며 골목 곳곳에 상을 차려놓고 한바탕 인사를 드리는 방식이었다. 이때는 유랑농악단이 가락을 도맡아서 밤늦게까지 쳤다. 대보름 당일 일정은 더욱 만만치 않았다. 오전부터 시작한 산정1리 마당밟이는 저녁 먹을 때가 가까워서야 끝이 났다. 영업하는 가게나 심지어 업무를 보고 있는 농협 창구와 주민센터 안까지 들어가 그 안을 돌며 악기를 쳤다. 부피가 큰 장구 때문에 슈퍼마켓 안에서 계란 한 판 깨먹을 뻔한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그래도 그럴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고 기뻤다. 풍물패동아리 몇 년을 하는 동안 상상도 못해본 일이다.

산정마을주민 중에는 소고춤을 잘 춰서 전라도 경연대회에서 높은 등수로 입상한 분도 계셨다. 지금은 다리수술을 해 못한다 하시면서도 흥을 어찌 누르랴 소고를 들고 유랑농악단 뒤를 쫓으셨다. 집집마다 마당을 밟으러 들어가면 집주인은 쌀과 물을 떠놓은 상을 차려놓고 기다린다. 우리는 가락을 치며 마당을 한바퀴 돌고 상 앞에서 인사를 올리며 잡귀를 쳐내고 만복을 빌었다. 중간중간 음식도 잔뜩 차려 먹여주셨다. 다들 반겨주시니 흥이 절로 났지만 그것도 오후 3시가 넘어가자 손에 물집도 잡히고 지치기도 했다.

끝에는 소리를 구성지게 하는 유랑농악단 친구가 해남에 얻은 새 집에도 굿을 해주고, 그 다음날 아침엔 유랑농악단과 친한 미세마을에서도 무사히 집 수리공사를 마치기 위한 굿과 마을 마당밟이를 했다. 아무래도 서로 잘 아는 사람들을 위한 굿에는 지친 와중에도 더더욱 진심이 담기고 그만큼 신도 더 났다. 힘들었던 건 까맣게 잊고 오히려 더 잘해주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했다.

유랑농악단이 아니었다면 마당밟이도 헌식굿도, 친구들의 집에 복을 빌어주는 일도 언제 해볼 수 있었을까싶다. 조금 더 늦었다면 이번에 처음 알게 된 헌식굿은 영영 역사 속으로 사라진 뒤였을 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르고 사는 모습이 계속 달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힘을 합쳐 매년 마을과 서로의 평안을 기원할 수 있다는 게 새삼 따뜻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서울, 경기, 강원도에 사는 사람들인데 특별한 연고도 없는 해남까지 가서 대보름을 지냈다는 것이 아쉽다. 꼭 옛날에 했던 방식이 아니라도 좋으니 우리도 우리 마을에서 마을 사람들과 서로 온기를 나누는 문화를 만들어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