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첩장처럼 찾아온 서리 자연농 배우는 참참
축복할 결혼이 많은 가을이었다. 주말마다 서울이며 강화도며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그러느라 시월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몰랐다.그러던 어느 날, 연애를 오래 한 친구의 청첩장처럼 된서리가 왔다. 오겠거니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 날이 오니 아무래도 좀 놀라게 된다. 해마다 서리를 보아왔을 텐데 그런 적이 있었나싶을 만큼 낯선 느낌이었다. 넓은 밭에 배추 조금 빼고는 참말 남김없이 쓰러졌다.그토록 줄기 굵고 잎 넓던 토란도 거무죽죽해져서는 맥없이 축 처져있었다. 다들 맛있다던 ‘토란대’는 결국 맛을 못 보게 됐다. 짝꿍과 부랴부랴 토란을 캐고 무르지 않은 토마토들을 초록색 녀석들까지 다 땄다. 큰 동아박 세 개와 씨를 받기 위해 남겨두었던 오이들도 거두었다. 고라니가 잎을 다 먹어 결실이 없던 메주콩도 조금은 살아남았다. 벌써 꼬투리가 절로 터져 콩알이 땅에 흩어져있는 걸 조금 주웠다. 강황과 야콘은 그러고도 일주일은 더 지나서 캤다. 농사라고 얼마 짓지도 않았건만 나름 가을걷이를 하고보니 이젠 보관이 큰일이다. 거두어 그대로 보관하면 쉬우련만 말려야하는 건 뭐가 그리 많은지. 물기가 있으면 아무래도 상하기 마련인가 보다. 고추, 고구마, 땅콩, 토란, 들깨까지 다 말리려니 우선 말릴 데가 없다. 시골집에 으레 딸려있는 마당의 쓰임새를 이제야 깨닫는다. 해가 떨어지면 금방 추워지고 이슬과 서리가 내리니 아침저녁으로 널었다가 들여놓았다가하는 일도 손이 여간 많이 가는 게 아니다. 아무리 부지런을 떨어도 날씨까지 도와주지 않으면 헛일되기 쉽다. 고추같은 건 이제 햇볕에 말리는 사람이 거의 없다. 다들 건조기 쓴다. 우리 고추도 개구리, 소금쟁이님 댁에 꼽사리 끼어 건조기 덕 좀 봤다. 그렇게 말리기까지 했는데 둘 데도 마땅찮다. 그 전까진 왜 그렇게들 저장고를 짓나 했다. 우리 집 작은 냉장고에는 다 넣을 수 없는 토란과 동아박 등을 다 어찌할 줄 모르고 있다. 너무 따뜻해도, 너무 추워도 안 된다. 집 안은 우리에겐 추워도 곰팡이에겐 딱 좋다. 동아박을 집 안에 두었다가 사흘 만에 바닥과 닿은 쪽에 곰팡이가 잔뜩 피었다. 토란은 책에 나오는 대로 밭 한쪽을 파 거기에 볏짚을 깔고 묻어두었는데, 그 얘길 듣는 분마다 여기는 다 얼어버려서 안 된다고 손사래를 치셨다. 깨갱. 더 추워지기 전에 토란 다시 파내러 가야한다. 옛날 사람들이 묵나물이며 김치며 장아찌같이 겨울에 보관하면서 먹을 수 있는 온갖 방법을 알아내지 않았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결국엔 개구리, 소금쟁이님 댁 저장고에도 신세를 좀 지고, 코드 빼놓고 선반으로 쓰던 원룸에 딸린 작은 냉장고도 켰다. 원룸 앞 복도에 그냥 놓아둔 것들도 있다. 그밖에도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있다. 짝꿍은 지푸라기 가져와서 새끼줄을 꼬더니 동아박을 껍질 벗겨 자른 뒤에 그 새끼줄에 줄줄이 끼워 매달아놓았다. 이름은 동아박고지 정도 되려나. 옛날에 할머니가 처마 밑에 곶감 매달아 말리던 게 떠오른다. 논에서 벼도 거두었는데 모래무지님이 작년의 십 분의 일도 안 된다고 하실 만큼 수확량이 적었다. 모내기 도와준 친구들도 조금씩이라도 맛보여주고 싶었는데 어림도 없을 정도다. 신경을 많이 못 쓴 탓이라곤 하지만 너무 이상해서 왜 그런가했는데, 알고 보니 멧돼지가 먹은 거였다! 멧돼지가 쌀을 좋아하는 줄은 처음 알았다. 산에 멧돼지를 먹는 포식자도 없고, 사람들이 도토리 같이 산에 있는 그들의 먹을 것을 다 뺏어오는 것도 문제다. 사람은 사람대로 먹을 것을 지켜야하니 우리도 머리를 맞대고 있지만 쉽지 않다.개구리님은 볏덕(건조대)에 걸어 말리고 있는 벼를 지키신다고 논에 텐트를 치고 주무시기까지 했다. 요즘 일거리 중 또 하나는 김장품앗이다. 동네 사람들이 김장 날짜를 서로 알고 다 모여서 김장을 한다. 날짜가 겹치면 안 된다! 짝꿍이 일하는 학교 청소하시는 분 김장하는 날 우리도 처음으로 도우러 갔다. 동네 아주머니, 할머니 분들이 다 오셨다. 그동안 오며가며 지나치기만 하다 인사 제대로 드렸다. 이 마을에선 김장을 하면 집주인이 솥에다 수육을 삶아 그날 담근 김치와 함께 도와준 이웃들에게 대접하나보다. 그날도 그랬다. 우리는 농사도 작게 짓고 김장도 크게 할 수 없는 걸 아셔서인지, 큰 통에 김치까지 잔뜩 담아주셨다. 정말 고맙게 받았지만 그것도 넣어둘 데가 없어서 맛도 못 보고 다른 집 저장고 신세지고 있다. 개구리, 소금쟁이님 댁 김장은 나 혼자 가서 도왔다. 배추 좀 나르다 밥이나 얻어먹으면 되는 나와는 달리 주인댁은 미리 배추 절이고 김장양념도 준비하고 손님 접대까지 해야 한다. 곁에서 보고 겪어보니 역시 김장, 보통일은 아니다. 우리도 밭에 배추와 무를 심어놨는데 다 조그맣다. 동네 분들은 그걸로 무슨 김장을 하냐며 웃으시지만 그래도 조그맣게나마 커준 녀석들로 김장 해보련다.우리 고추 말려놓은 것 믹서에 갈아서 고춧가루도 쓸 거다. 양념재료는 많이 물어도 보고, 구하기 어려운 건 좀 빼고 해야 할 듯싶다.잔뜩 해서 여기저기 나눠주는 꿈도 꾸어봤는데 우리 깜냥으로는 아직 무리다. 먹을 궁리도 한 재미다. 땅콩은 햇볕에 잘 말리면 날것으로 먹을 수 있다. 특히 토종땅콩은 크기는 작지만 비리지 않고 어찌나 맛있는지 모른다. 진짜 심심풀이 땅콩이라 옆에 두고 하나씩 까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덜 익은 토마토는 어떡할까? 미국에서는 그걸 튀겨먹는단다.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다. 장아찌, 피클로 담그면 좋다는 얘기도 많다. 짝꿍은 잼을 만들었다. 설탕의 종류와 양, 얼마나 졸여야할지 등 실험 중이다. 잼 전에는 처음으로 막걸리를 만들었는데 시간이 촉박해서 추수 도우러 온 손님들에게 모르고 덜 발효된 막걸리를 대접했다. 그래도 맛있다고 몇 잔이나 마신 분도 있었는데 그게 뱃속에서 발효가 되면서 밤새 배에 가스가 찼단다. 그날 손님 여섯 분이 개구리님 사랑방에 묵었다는데, 난 그 방에서 안 잤다. |
'내가 바라는 글쓰기 > 귀농귀촌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은책 18.1월) 체험 시골 알바의 현장 (1) | 2018.03.06 |
---|---|
작은책 17.11월) 골치 아픈 집짓기 (0) | 2018.03.06 |
작은책 17.10월) 군대에 있을 때보다 삽질을 더 많이 했다 (0) | 2017.09.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