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라는 글쓰기/귀농귀촌 이야기

모든 생명은 다른 생명에게 그 삶을 빚지고 있다

참참. 2017. 6. 17. 17:01



편의점 일은 밤늦게 끝나고 낮엔 날씨가 워낙 덥다. 그런 핑계로 어젠 안 가고 오늘은 그나마 좀 서둘러 아침에 밭에 갔다. 중간에 하루 안 갔을 뿐인데도 오랜만에 온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1. 수박 싹

우리가 심어놓고서는 싹이 나오지 않았다고 생각해선지 다른 풀들과 구분을 못해선지 놓치고 잊어버린 수박 싹이 이렇게 나와 있었다. 싹이 나오자마자 옆에 풀들을 정리해준 녀석들과 비교해보면 줄기가 더 높이 자란 뒤에 잎이 나왔다. 키가 더 큰 풀들 사이에서 조금이라도 햇빛을 받아 살아보겠다고 까치발을 들고 서있는 듯했다. 저 힘없는 줄기를 저기까지 들어 올린다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텃밭농사를 해본 사람들은 모종을 심어본 경험이 많을 텐데, 모종을 밭으로 옮겨 심으면 그 녀석들이 뿌리가 활착되기 전까지는 좀 비실비실하다. 잎이 누렇게 되기도 한다. 이런 걸 몸살을 앓는다고 한다. 재밌는 표현이다. 본래 한 자리에서 태어나면 죽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 식물의 입장에서 상상해보면, 갑자기 물 한 모금 주지 않고 굶긴 다음 혼수상태에 빠진 사이에 말도 안통하고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 외딴 곳에서 깨어나 살아남아야하는 거나 다름없는 거 아닐까?

이렇게 밭에서 온갖 풀들과 눈을 맞추다보니 이 녀석들도 살고자 정말 안간힘을 쓰고 있구나하고 느꼈다. 바다 건너와서 낯선 땅에서 싹을 틔우는 녀석들도, 인간이 매일 뽑고 베어서 다시, 또 다시 자라나는 녀석들도. 어쩐지 위로가 된다.

 

2. 흰나비

초록의 밭 위를 날아다니는 하얀 나비가 참 예쁘다. 그렇지만 흰나비는 배추를 먹이로 삼고자하는 사람에게는 이른바 해충에 해당한다. 우리의 아직 작은 양배추와 방울양배추에도 나비들이 끊임없이 알을 낳고 있다.

우린 그 알들을 잎에서 떼어낸다. , 죽인다. 그러지 않으면 우린 배추를 먹을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어떤 생명은 항상 다른 생명들의 죽음 위에 있다. 나는 작물을 살리기 위해 작물과 너무 가까이에 났거나 햇빛을 가려버리는 다른 풀들을 베어낸다. 꼭 사람이 죽이는 게 아니더라도 그 땅에 떨어진 수많은 씨앗 중에 어떤 씨앗이 싹을 틔워 그 자리에 줄기와 잎을 내어놓는다는 것은 다른 씨앗은 그러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 땅의 현재 상태, 그 지역의 기후, 땅 속과 둘레에 살고 있는 생물들의 종류, 등등에 따라 어떤 식물들이 번성하고 어떤 식물들은 쉽게 자라지 못한다. 특히 큰 나무는 햇빛을 가리기 때문에 다른 식물들이 새롭게 자라는 걸 방해하는 경우가 많다. 커다란 나무들로 빼곡한 숲에 가보면 나무들 밑에는 밭에 그렇게 많이 나는 온갖 풀들이 별로 없음을 알 수 있다. 보통 작년에 떨어진 낙엽들만 쌓여있다. 그렇게 자라난 식물들을 온갖 벌레와 곤충과 동물들이 먹고 알다시피 그것들을 또 다른 녀석들이 먹는다. 아직도 다 알 수가 없을 만큼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3. 기생벌

오늘 아침에는 이파람이 애써 키우던 산호랑나비 번데기에 구멍이 뚫려있는 걸 발견했다. 번데기에서 나비가 나왔으면 등이 터지면서 나오지 저렇게 동그란 구멍이 뚫리지는 않을 텐데 무슨 일일까. 범인은 기생벌. 기생벌은 나비 등의 애벌레에 알을 낳고 그 알은 숙주인 애벌레의 몸속에서 기생하다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면 번데기의 속을 갉아먹고 구멍을 뚫고 나온다고 한다.

생각보다는 흔한 일인가보다. 나야 그저 옆에서 구경만 했지만, 이파람이 예쁜 애벌레라며 데려와서 미나리를 갈아주며 애지중지 키운 녀석이었다. 아름다운 산호랑나비를 볼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기생벌이라니. 그걸 검색해서 알게 되고 처음엔 좀 끔찍했다. 근데 다시 한 번 생각해보니 우리라고 딱히 다를 게 있나? 모든 생명은 다른 생명에게 그 삶을 빚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