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라는 글쓰기/귀농귀촌 이야기

작은책 17.5월) 나는 어쩌다 홍천에 오게 됐나

참참. 2017. 5. 11. 07:59

나는 어쩌다 홍천에 오게 됐나(작은책 5월호에는 '진달래 따기, 엄청난 도전!'이란 제목으로 실림)

자연농 농부가 되고 싶은 참참

홍천에 온 지 2주쯤 됐는데 시골이야기를 쓰자니 적이 멋쩍다. 이삿짐 나르고 정리하는 동안엔 밥도 중국집에서 먹고 실감이 잘 나지 않았는데, 밖에 나가 지천에 널린 봄나물 캐다 밥을 해먹으니 이제 참말 시골에 온 것 같다. 먹을 수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던 쇠뜨기라는 풀을 곁지기가 발견해 일본 유튜브 영상까지 찾아가며 요리를 해먹었다. 꽤 맛있어서 요즘 곁지기는 뱀밥(쇠뜨기 생식줄기의 다른 이름)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밖에도 냉이, 달래, , 파드득나물, 꽃다지, 개망초 등 먹을 수 있는 나물들이 마구마구 돋아나고 있다. 일단 봄에는 굶어죽기 어려울 거 같아 다행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몇 년 전부터 시골에서 자급자족하며 사는 것을 상상했었다. 그러나 불과 일이년 전까지만 해도 막연한 바람일 뿐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그러다 재작년 지금의 곁지기 이파람을 만났고 서로 같은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우리는 결혼과 함께하는 삶을 고민하던 끝에 더 미룰 것도 없이 올해엔 귀농귀촌을 하기로 결정했다. 갑작스런 결정이니만큼 고민도 많았지만 도시에 큰 미련도 없고 버틴다고 해서 앞으로 도움이 될 만한 목돈을 모으기도 어렵다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그건 더 이상 우리가 살고 싶은 삶이 아니다.

나는 강릉 사천면이라는 시골에서 자랐다. 그 시절 시골에서 맨날 노는 것치곤 성적이 잘 나왔다. 돌이켜보면 TV에서도, 어떤 어른도 서열이 높은 대학과 돈 많이 버는 일을 찬양했고 그것들은 다 서울에 있었다. 성적 좋으면 서울로 대학 가고 대학 나오면 서울에서 직장 찾는 게 당연하게 느껴졌다. 내가 마을에서 농사지으며 산다는 건 나도, 우리 할머니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된장이나 김치 담그는 것처럼 꼭 필요한 일마저도 가르쳐주려고도, 배우려고도 하지 않았다. 분명 긴 세월 옆에서 보고 돕기도 했는데 지금도 하나도 할 줄 모른다. 그랬던 내가 대도시에 산지 고작(?) 6년 만에 강원도 홍천에 와 있으니 신기할 따름이다.

어쩌다 시골을 꿈꾸게 됐을까? 중학교까지 시골에서 다니다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됐다. 거기서 처음 그렇게 낮은 성적을 경험해봤다. 시험이 스트레스가 되고 수업시간에 졸고 선생님 설명을 이해하지 못한 것도, 잠자리에 누워 오래 뒤척인 것도 처음이었다. 더 이상 새로운 수업내용이 궁금하지 않게 됐다. 수업은 그때부터 고통스런 의무가 되었다. 해야 된다고 생각할수록 더 하기 싫었고, 하기 싫어질수록 졸음은 쏟아지고 내용도 이해할 수 없게 됐다. 가장 즐거웠던 수학은 거들떠보기도 싫은 무언가가 됐다.

그제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둘러보니 전엔 한 번도 못 본 대학 교수나 의사 부모님을 둔 아이들이 많았다. 재능과 노력만으로 성적이 결정된다면 명백히 불가능할 비율이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성적에 도움 안 되는 책들을 통해 이 사회에 가득한 비상식과 부조리가 점점 더 삶의 중심이 되어갔다. 알게 된 이상 모르는 척할 수 없는 끔찍한 현실 속에서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이건 계속 고민이지만, 결국 내 삶부터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는 믿음을 얻었다.

삶을 바꾸려 하는데 도시에 살면 세상을 더 나쁘게 만드는 일을 자꾸만 돕게 된다. 서울에서 전기를 쓰면 다른 곳에서 어마어마한 전기를 만들고 옮겨와야만 한다든지, 썩지 않는 비닐과 플라스틱을 매일 쓰게 된다든지, 싼 물건을 사면 물건 만드는 사람들이 낮은 임금을 받으며 일하게 만드는 꼴이 된다든지 하는 식이다. 늘 빠졌던 딜레마의 예를 들어보면 이렇다. 어떤 기업이 노동자를 함부로 대하고 마구 잘랐다면 그 기업의 물건을 쓰기가 싫다. 그러나 그 물건은 필요하다. 그럼 다른 기업에서 만드는 비슷한 물건을 사야 한다. 문제는 더 좋은 다른 기업이 거의 없다는 거다. 특정 분야들은 한두 개의 기업이 독과점하고 있기도 하고, 사회에 노동환경 안 좋은 나쁜 기업이 워낙 많아서 그렇기도 하다. 이러니 큰 불매운동뿐 아니라 혼자 불매하기도 쉽지 않다. 그럼 그 기업은 여전히 물건 잘 팔리고 돈 버니까 노동조건을 개선할 이유도 없다. 노동조건을 나쁘게 만들수록 돈 번다는 게 그들의 굳은 믿음이다.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고자하니 일단 물건을 덜 써야하고 쓰더라도 유통구조를 덜 거친 것, 누가 만든 것인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아는 것들로 쓰면서 많은 것을 직접 키우고 직접 만들고 직접 해서 먹는 수밖에 없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시골에 산다고 물건 안 쓰고 살기는 어렵다. 우리는 전기도 기름보일러도 끊지 않았다. 앞으로도 전기 끊고, 비닐이나 플라스틱 한 개도 안 쓰고 살 자신은 없다. 그러나 그런 걸 쓸 때마다 마음 불편해하면서 살고자 한다. 플라스틱 쓰레기에 죽어가는 동물들에 마음 아파하면서, 지구 반대편에서 죽어가는 사람들도 생각하면서,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쉬이 하지 않으며 살고 싶다.

많은 시골 중 하필 홍천으로 오게 된 것은 인연에 이끌려서다. 홍천엔 오래 봐야 보이는 것들등을 쓰고 일본책 자연농 교실’, ‘짚 한오라기의 혁명등을 옮긴 개구리님과 그 옆으로 귀농한 모래무지님도 계신다. 우리는 작년에 개구리님이 안내자를 맡고 모래무지님이 알리고 도우신 지구학교 수업을 들었다. 원래 책으로만 알았는데 곁지기가 작년 봄에 인터넷 검색으로 지구학교를 찾아냈다. 그렇게 인연을 맺고, 모래무지님께서 당신의 논과 밭에서 시골살이를 겪어보고 자연농을 배울 수 있게 도와주셔서 이사까지 올 수 있었다. 어디에 살든 그렇지만 시골은 더더욱 이웃이 중요하기도 하고, 기계화학농이나 유기농보다 자연농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컸다.

홍천에 오기로 결정하고보니 운명이었는지 다른 인연도 있었다. 서울 살 때 매주 꾸러미를 보내주셨던 언니네텃밭 홍천 생산자공동체가 바로 옆 마을에 있었던 거다! 이사 오기 전에 가서 찾아뵈었더니 여러 말씀과 도움도 주셨다. 지난주엔 꾸러미 발송하는 날 찾아가 일도 도와드리고 반찬도 받아왔다. 그랬더니 아예 매주 와서 같이 밥 먹고 택배 포장하고 도시에서 돈 내고 받던 농산물이나 반찬도 좀 가져가면 어떻겠냐고 제안해주셨다. 우리가 직접 농사짓고 캐려면 잘 알지도 못하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데 함께 밥도 먹고 반찬거리도 얻을 수 있으니 고마운 마음으로 함께하기로 했다. 그런데 한 주 더 갔더니 이번에는 도시소비자들에게 보낼 진달래를 한번 우리 부부가 따보면 어떻겠냐고 하신다. 우리에겐 엄청난 도전! 아직 이 마을 어느 산으로 가야 진달래가 많은지도 잘 모르는데, 과연 우리는 무사히 생산자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