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라는 글쓰기/청년유니온 기자단

[한겨레 훅] 나라가 이 꼴이라 더 연애가 필요하다

참참. 2013. 11. 22. 14:30

얼마 전 '한겨레 훅'에 실었던 글입니다.

http://hook.hani.co.kr/archives/5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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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이 꼴이라 더 연애가 필요하다


얼마 전 모 아나운서가 열애설을 해명하며 트위터에 쓴 글 일부가 굉장히 화제가 됐다. 화제가 된 것은 뒤에 덧붙인 ‘나라가 이 꼴인데 무슨 연애’라는 짧은 글귀였는데, 이 글귀는 연애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 신선한 변명거리가 되어주며,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여기저기서 수많은 패러디가 올라왔다. “나라가 이 꼴인데 공부는 무슨”, “나라가 이 꼴인데 무슨 단풍 구경?”, “나라가 이 꼴인데 내 꼴은”, “나라가 이 꼴인데 셋째 아이를 낳았다”, “나라가 이 꼴인데 술이라도 먹어야지”하는 식이다. 급기야 “후배의 연애를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나라를”이라는 선배 아나운서의 응원까지.

그렇다면 여기서 모 아나운서가 처음 말한 ‘나라가 이 꼴’이라는 건 무엇에 대한 이야기일까? 아무래도 연일 굵직한 사건들이 터져 나오는 정치판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는 쪽이 설득력이 있다. 그럼 이 글귀를 가져다 쓰며 즐기는 사람들은 어떨까? 내 생각엔 ‘나라가 이 꼴’이라는 말을 하고, 들을 때 꼭 특정 정치적 사건을 떠올리는 건 아닌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OECD 최장노동시간과 무한경쟁, 높은 자살률, 고용불안정과 저임금, 높은 물가와 주거비용, 심각한 가계부채 등 참 살아남기 어려운 이 나라의 온갖 꼴들이 떠오른다.

그렇다. 처음에 그가 정확히 어떤 꼴을 두고 얘기한 것인지는 몰라도, 확실히 연애하기 좋은 나라꼴은 아니다. 우리 청년들은 심지어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삼포세대라는 말까지 듣고 있다. 말만 들어도 슬프다. 그렇지만 나라가 이 꼴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는 더더욱 연애를 해야 한다.

왜? 우리가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바꿔나가고자 할 때 필요한 건, 거창하고 정교한 이론보다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감수성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감수성은 마음이 열려있는 상태에서만 지닐 수 있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사실 피곤한 일이다. 그건 쉽게 감동받는 대신, 상처받기도 쉬운 일상을 각오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종종 우리는 그저 ‘별일 없이’ 하루가 지나가기만을 바란다. ‘동요하지’ 않고 ‘시달리지’ 않고 싶다. 그래서 어른이 될수록 우리는 마음을 닫아놓고 산다.

어쩌면 청춘이라는 시기가 아름다운 것은, 마음을 열어놓고 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헌데 우리 시대의 청년들을 보면 청춘이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벌써부터 마음을 꼭꼭 닫고 사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닫힌 마음으로는 타인의 고통에도 공감하기 어렵고, 내 아픔을 드러내 보이기도 어렵다. 자연스레 더 따뜻한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나 노력과도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마음을 열어줄 수 있는 것이 또한 연애다. 연애란 한 사람과 가장 깊고 내밀한 감정을 주고받는 일, 마음을 닫아놓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열리기 시작한 마음이 나중엔 그 사람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볼 수 있게 해주기가 쉽다.

부조리함에 대한 분노 역시 다르다. 내가 당했으면 욕이나 몇 마디 내뱉고 넘어갈 수 있는 일도, 사랑하는 사람이 당했을 때는 그렇지 않다. 아픈 것조차 대신 아파주고 싶은 연인이 불합리한 사회구조에 피해를 입고 상처를 받는다면 어찌 분노하지 않겠는가.

내가 늘 한수 배우는 연애의 고수, 김민식 PD님도 이런 말을 했다.


“봉사하다, 운동하다 눈맞는 주위 사람들 흉보지 마세요. ‘아니 왜 야학 와서 지들끼리 눈이 맞아?’ ‘아니, 데모는 안하고 왜 연애를 하고 지랄이야?’ 그러지 마세요.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에 있어, 연애, 결혼, 출산만큼 좋은 동기부여는 없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내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 내가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서 더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 정말 멋진 목표 아닌가요?

경쟁에 빠져들수록 개개인은 불안해지고 외로워집니다. 이명박 정권이 한 짓 중 제일 나쁜 게 ‘국가 경쟁력 강화’라는 명분으로 복지 체계를 망가뜨리고, 사회 불안을 증대시킨 겁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 그래야 서민들이 서로 경쟁하느라 부조리한 정치나 사회에 시선을 못 돌리거든요. 정말 약 오르지 않나요?

그럼,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저항은? 촛불 집회 나온 사람들끼리, 파업 지지 콘서트에 나온 사람들끼리 눈 맞아서 연애를 하는 거죠. 저들 보란 듯이 동지적 사랑을 키우며 더 가열차게 싸우는 겁니다. 함께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겁니다.”(김민식 PD 블로그 글 ‘세상을 바꾸는 연애를 하자’ 중에서 발췌. 출처: http://free2world.tistory.com/383)


아닌 게 아니라, 내가 첫 여자친구와 연애를 시작한 날도 5월 1일 노동절이었다. 거기서 처음 만난 건 아니지만 함께 노동절 집회에 참여하고, 학교에 돌아와 고백을 했다. 그때는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우린 둘 다 세상이 더 좋은 방향으로 변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고, 서로의 그런 마음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연애를 하면서 내 그런 바람은 더 강해졌고, 나도 뭔가를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까지 생겼다.

나를 지지해주고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 놀라운 일이다. 설령 그 모든 노력이 실패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내 의지와 노력을 알아주고 곁을 지켜줄 사람이 있기에, 불안하지 않았다. 내가 바꿀 수 없을 거라는 회의와 무력감을 이겨낸 건, 돌이켜보면 분명 그 덕분이었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든다. 연애 중에는 몰랐던 연애의 힘이다. 그때의 추억들과 그때 받아들였던 삶의 태도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 내 일부가 되었다.

그러니, 나라가 이 꼴일수록 더 연애를 해야 한다. 연애하기 좋은 나라꼴 기다리다가는 평생 연애 근처에도 못 가볼지 모른다. 오히려 나라가 이 꼴일 때야말로, 나라를 위해서라도 연애를 시작해야할 때인 것이다. 당신의 사랑 덕분에 이 추운 겨울, 영 별로인 나라꼴도 조금은 따뜻해질 수 있으리라. 이 싸움, 절대 짧지 않다.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 한다는 말도 있잖은가. 지금 우리에게 가장 급한 문제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바로 연애다.


- 청년유니온 조합원 김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