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라는 글쓰기/귀농귀촌 이야기

배운 게 도둑질

참참. 2018. 7. 24. 18:51

배운 게 도둑질

자연농 배우는 참참

 

시골에서 생계를 꾸리다보니 홍천 읍내 학원에서 중학생 과학강사 일을 시작한 데 이어 과외까지 하게 됐다. 고등학생 과외까진 안 하고 싶었는데, 이웃이 동네에 과외해줄 사람이 없다며 간곡히 부탁하셔서 맡게 됐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더니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보다. 학생은 옆 동네 사는 고등학교 1학년생이고 과목은 수학이다. 수학 과외라니, 서울을 떠나기로 결정할 때도, 작년 한 해 여기 살면서도 생각도 못해본 일이다. 게다가 사실 난 고등학교 때 수학을 그리 잘하지 않았다. 중학교까지는 수학이 재밌었고 성적도 잘 나왔지만 고등학교부터는 학교 진도를 못 쫓아갔다. 그런 내가 돈을 받고 수학을 가르치게 될 줄이야!

그리 잘하지도 않았던 고등학교 수학인데 어느새 졸업한지도 10년이 다 됐으니 기억이 날 리 없다. 과외 날짜가 잡히고 부랴부랴 EBS에 들어가서 무료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돈 받고 하는 일인데 잘 알아야하는데 첫 수업이 일주일밖에 안 남았다는 위기감이 컸다. 이미 1학기가 절반 이상 지나고 있기에 앞부분을 숙지하고 현재 공부하는 곳을 가르치자면 내용이 꽤 많았다. 급한 마음에 강의를 1.5배속, 2배속으로 들었다. 그랬는데 이게 웬걸? 점점 고등학교 수학이 재밌어졌다.

왜 고등학교 땐 어렵기만 하고 재미가 하나도 없던 게 이제 와서 재밌어질까? 그땐 이해가 안됐는데 지금은 그 내용과 의미들을 이해하게 됐다. 일단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가 재밌을 수는 없다. 이해하게 된 이유를 생각해보니 첫째로는 EBS 선생님을 잘 만났다. 내 스타일과 정말 딱 맞는 선생님이다. 난 수학은 무작정 암기해서는 절대 안 되고, 이해만 할 수 있으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가서 내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다른 선생님들이나 학생들은 아무도 그런 식으로 하지 않다보니 내 믿음도 흔들렸다. 그랬는데 지금 이 EBS 강사가 바로 그렇게 이야기하고 거기에 맞게 가르친다. 한마디, 한마디가 귀에 쏙쏙 들어온다.

둘째로는 누군가에게 가르쳐주어야한다는 마음가짐이다. 배우는 사람으로 문제를 풀고 이해하고자 했던 때와 가르쳐야한다는 마음으로 접근했을 때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가르치는 게 가장 많이 배운다는 건 이제 상식이지만 그 차이의 정도는 겪을 때마다 놀라울 지경이다. 무엇을 하나라도 가르치고자하면 나 자신부터 완전히 납득해야한다. 내가 납득하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가르치겠는가. 스스로를 이해시켜 받아들이고 다시 그걸 내 언어로 꺼내어 누군가에게 쉽게 이야기하려 하니 의미들이 머리에 팍팍 박힌다. 그래서 나에게 모르는 걸 물어보는 친구가 있다면 내 공부에 엄청나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

과외를 시작하며 영화도 한 편 봤다. <불량소녀, 너를 응원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일본영화다. 과외를 하더라도 동기를 부여하고 학습법을 잡아주는 것이 수학 교과 내용 한 시간 전달하는 것보다 더 핵심이라 생각해서 그런 쪽으로 도움이 될까 싶어 봤다. 최하위권 학생이 1년 만에 명문사립대에 합격한다는 영화 내용은 놀라웠다. 그렇지만 마냥 재밌게만 보지는 못했다. 불편했다. 한마디로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싶은 거다. 명문대 입학이란 목표는 맹목적이다. 그게 뭐라고 삶의 즐거움, 친구들, 건강까지 포기하느냐는 말이다.

대학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사실 대학생활 별 거 없다. 같은 대학에 다녀도 수만 가지 생각을 가진 다양한 사람이 있고, 오히려 남에게 폐만 끼치며 사는 사람도 많지 않나. 대학에서 무얼 배우고 어떤 활동을 해서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가 어느 대학에 가느냐보다 몇 천 배, 몇 만 배 더 중요한데 그런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 고등학교 성적을 잘 받아서 서열이 높은 대학에 가는 게, 고작 그게 인생의 목표라도 되는 것처럼 다루는 게 그래서 불편하다. 실화의 주인공은 그 대학에 입학해서 지금은 뭘 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그건 아쉬웠지만 나름의 감동도 있다. 한 사람, 한 사람 그 사람에게 맞는 동기 부여와 코칭을 해준다는 발상과 그 실천이 좋았다. 학교에선 인생에서 극히 작은 부분인 교과공부 성적이라는 한 가지 재능과 노력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그 틀에 맞지 않으면 구제불능 취급하는 일이 많다. 그런 학교를 오래 다니면 이미 자신이 무언가 해낼 수 있다는 믿음조차 잃어버리기가 쉽지 않을까? 게다가 그러한 학교와 부모에 대한 반항심으로 더더욱 그들이 싫어하는 쪽으로 스스로를 파괴하기도 한다. 그게 즐겁고 거기에서 의미를 찾아서 어떤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단지 복수하려고 그들이 싫어하는 인간이 되는 가장 쉬운 길을 찾는 거다. 그런 아이들을 구한 게 츠보타 선생님이다. 나를 인격체로 봐주고 내 가능성을 믿고 진심으로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그들의 삶에 얼마나 큰 의미였을까? 맹목적인 목표라 비판했지만 그게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는 목표만 아니라면 내 능력을 최대로 끌어내어 무언가 어려운 목표를 성취해본 경험이 나쁠 리가 없다. 모르긴 몰라도 앞으로의 삶에 어마어마한 자산일 거다.

다시 과외 얘기로 돌아오자면 아직 몇 번 안 만났는데 고민이 많이 생겼다. 세어보니 앞으로 내가 학생과 여섯 번 정도 더 만나면 학교에서 기말시험을 치르게 된다. 여섯 번, 처음 약속한 시간보다 두 배 늘려서 수업해도 고작 열두 시간이다. 그 시간에 내용을 전달하면 얼마나 할 수 있을까? 게다가 내가 아무리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해준다고 해도 결국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다. 내가 설명해준 걸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고 그걸 머릿속에서 다시 꺼내어 문제에 적용시켜보는 걸 혼자 하는 과정이 빠진다면 금방 까먹을 뿐이다. 혼자 공부하자면 성취감을 느껴봐야 한다. 잘하는 게 뭐냐고 하니 별 고민도 없이 없다고 답하는 그가 어떻게 하면 성취감을 맛볼 수 있을까?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되찾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