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라는 책읽기/마음이 머무는 구절

《리틀라이프》, 한야 야나기하라, 권진아 옮김

참참. 2021. 1. 3. 09:42

 그가 했던 2막 끝 마지막 대사는 절대 잊지 못했다. 아내가 떠나고 싶다고, 이 결혼에서 충족감을 느낄 수 없다고, 분명 더 나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선언하자, 남편이 하는 말이다.

세스 하지만 이해 못 하겠어, 에이미? 당신은 틀렸어. 모든 걸 다 주는 관계는 없어. '어떤' 것들만 주는 거라고. 누군가에게서 바라는 것들을 다―예를 들어, 성적으로 잘 맞는다거나 대화가 잘 통한다거나 경제적 지원이라거나 지적 관심사가 잘 맞는다거나, 상냥하다거나, 충실하다거나―생각해보고 그중 세 개만 택해야 하는거야. '세 개', 바로 그거야. 아주 운이 좋으면 어쩌면 네 개를 가질 수도 있겠지. 나머지는 딴 데서 찾을 수밖에 없어. 원하는 걸 다 주는 사람을 찾는 건 영화 속에서나 있는 일이야. 하지만 이건 영화가 아니잖아. 현실세계에서는 남은 인생에서 그중 어떤 세 가지를 가지고 살고 싶은지를 파악하고, 그걸 가진 사람을 찾아야 하는 거야. 그게 진짜 인생이라고. 그게 함정인 걸 모르겠어? 계속 모든 걸 다 찾으려 하다가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게 될 거야.
에이미 (울면서) 그래서 당신은 뭘 골랐는데?
세스 모르겠어. (소리) 모르겠어.

 그 당시 그는 이 말을 믿지 않았다. 그때는 정말로 모든 게 가능해 보였다. 그는 스물셋이었고, 다들 젊고 매력적이고 똑똑하고 멋졌다. 모두들 몇십 년 동안, 평생 친구로 지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고 싶거나 데이트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바라는 것들이 같이 살고 싶거나 같이 있고 싶거나 묵묵히 함께 견디고 싶은 사람에게서 원하는 바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똑똑하다면, 운이 좋다면, 이걸 깨닫고 받아들인다. 자기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뭔지 파악하고, 그걸 찾아다니고, 현실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 다른 선택을 했다. 로먼은 미모, 상냥함, 나긋나긋함을 선택했다. 맬컴은 신뢰도, 능력(소피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능률적이었다), 미학적 양립성을 선택한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그는 우정을 선택했다. 대화, 친절, 지성.


<리틀라이프>, 한야 야나기하라 씀, 권진아 옮김, 시공사, 2권 212~213쪽

 

 가끔은 자기가 누구인지 기억도 못 할 정도로 자신에게서 아득히 멀어진 채 깨어난다. "여긴 어디지?" 그는 필사적으로 묻는다. "난 누구지? 내가 누구야?"

 그 순간, 귀 바로 옆에서, 너무 가까워서 마치 자기 머리에서 나온 것처럼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린다. 윌럼이 속삭이는 주문이다. "넌 주드 세인트 프랜시스야. 내 가장 소중하고 오랜 친구. 해럴드 스타인과 줄리아 앨트먼의 아들. 맬컴 어바인과 장-밥티스트 마리온, 리처드 골드파브, 앤디 컨트랙터, 루시엔 보이트, 시티즌 반 스트라튼, 로즈 애로스미스, 일라이저 코즈마, 페드라 드 로스 산토스, 헨리 영들의 친구지.
 넌 뉴요커고 소호에 살아. 예술협회와 무료급식소에서 자원봉사를 해.
 넌 수영을 잘하고, 베이킹도 잘하고, 요리도 잘해. 책을 많이 읽고, 목소리가 아름다워. 더 이상 노래는 안 하지만. 피아노도 정말 잘 치지. 넌 예술품 수집가야. 내가 다른 곳에 가 있을 때는 근사한 문자들을 보내줘. 넌 참을성이 많고 관대해.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남의 이야기를 가장 잘 들어주는 사람이야.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모든 면에서 제일 똑똑해. 모든 면에서 제일 용감하고.
 넌 변호사야. 로젠 프리처드 앤드 클라인의 소송분과장이지. 넌 네 일을 좋아하고, 열심히 해.
 넌 수학자고 논리학자지. 몇 번이나 날 가르쳐보려 애썼어.
 넌 끔찍한 취급을 받았는데, 그걸 다 극복했어. 넌 언제나 너였어."

 윌럼은 끝도 없이 이야기하고 주문을 외워 그를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낮에때로는 며칠 후에그는 윌럼이 했던 말을 조각조각 떠올리고 마음 깊이 간직한다. 그가 했던 말만큼이나 하지 않은 말들, 그가 그를 정의하지 않은 방식 모두를 소중히 간직한다.

<리틀라이프>, 한야 야나기하라 씀, 권진아 옮김, 시공사, 2권 269쪽

 

"하지만 어쩌면 그건 정말 그에겐 행복한 시절이었을지도 몰라. 자유로웠잖아. 사랑하는 일이 있었고, 젊은 무용수들의 스승이었고, 발레단 전체를 바꿔놓았어. 최고의 안무들을 내놓았고. 누레예프와 그 덴마크 무용수―"
"에릭 브룬."
"맞아. 그와 브룬은 여전히 함께였잖아, 적어도 조금은 더. 젊었을 때는 어쩌면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들을 경험했고, 그 모든 것, 돈과 명예와 예술적 자유를 즐길 정도로 여전히 젊었지. 그리고 사랑. 우정도."

 그들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팠잖아." 윌럼이 마침내 말했다.
 "그때는 아니었어." 주드가 상기시킨다. "본격적으로는, 적어도."
 "아니, 그건 아니었을지 모르지." 그는 말했다. "하지만 죽어가고 있었어."
 주드가 그를 보며 빙긋 웃었다. "아, 죽어가고 있다고." 그는 무시하듯 말했다. "우린 다 죽어가고 있어. 그는 계획보다 자기 죽음이 조금 더 빨리 온다는 걸 알았을 뿐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행복한 시절이 아니었다고, 그게 행복한 인생이 아니었다고 할 수는 없지." 그는 주드를 쳐다봤고, 그 순간 주드와 주드의 지난 인생에 대해 정말로 생각할 때 가끔 느끼곤 하는 감정을 느꼈다. 슬픔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동정하는 슬픔이 아니었다. 그건 더 큰 슬픔이었다. 고군분투하고 있는 가엾은 사람들, 자기도 모르는,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는 수십 억 명의 사람들을 다 감싸 안는 것 같은 슬픔이었다. 매일매일이 너무나 힘들 때에도, 상황이 너무나 비참할 때도, 사방에서 사람들이 살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생각하면 느끼게 되는 경탄과 경외심이 뒤섞인 그런 슬픔이었다. 인생이란 너무 슬프구나, 그런 순간이면 그는 생각했다. 너무 슬프지만, 그래도 사람은 다 그렇게 사는 거지. 삶에 매달리고, 위안거리를 찾고.

 하지만 물론 이런 말을 하진 않았다. 그는 몸을 일으켜 주드의 얼굴을 잡고 키스한 뒤 다시 베개에 기댔다. "넌 어쩌다 그렇게 똑똑해졌어?" 주드에게 묻자, 그는 빙긋 웃기만 했다.

<리틀라이프>, 한야 야나기하라 씀, 권진아 옮김, 시공사, 2권 288~2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