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0~2022

구원 환상 Rescue fantasy

참참. 2020. 8. 23. 14:20

 

어제 Zoom으로 대체되어 진행된 심리학 모임에서 구원 환상(Rescue fantasy)이라는 용어를 접했다. 그러고보면 어릴 때부터 그런 환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가 나를 구원해주거나 혹은 내가 누군가를 구원해주고 싶다는. 특히 불행한 삶을 살고 있거나 사랑받아보지 못한 사람을 내 사랑으로 구원해주는 구원자가 되고 싶다는 환상.

현실적으로 보면 그런 오만하고 같잖은 생각이 없고, 그게 그런 식으로 되지도 않는 거니까.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고. 그래서 그런 동화 속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거나 혹은 내가 백마 탄 왕자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유치한 환상은 오래 전에 버린 줄 알았다. 그렇지만, 그 용어를 듣는 순간 내 안에 아직도 그 환상이 남아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됐다.

그리고, 이젠 정말로 버릴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구원은 고사하고 누군가에게 안정감을 주기에는 내가 너무 불안한 사람이다. 감정기복도 큰 편이고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상처도 많이 받는 편이다. 언어로 표현되는 것에 민감하다. 특히 글로 쓰여진 것들에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많이 흔들린다고 느낀다. 누군가에게 안정감 있는 사랑을 계속 주려면 내가 어느 정도 안정되어 있어야하는데, 나는 빠르게 타오르고 빠르게 식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열정이 생기고 기분이 내킬 때는 세상 잘해주지만 피곤하거나 내가 힘들 때는 나도 그저 기대고 싶고, 상대가 나에게 무언가 해주길 바란다.

꾸준히, 일관되게, 든든하게, 한결같이. 이런 가치들을 지향하지만 지금까지의 난 그런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런 나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이젠 차라리 나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어느 정도 독립적이고, 무던하고, 내 감정기복에 너무 심하게 같이 흔들리지 않는, 흔들리더라도 스스로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쓰면서도 참 이렇게 대놓고 이기적일 수가 있나 싶지만. 물론 나도 더 나은 사람이려고 계속 노력하겠지만.

실은, 요즘은 연애같은 건 이제 무섭고 두렵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한다. 과연 그런 걸 내가 다시 할 수 있을까, 차라리 그런 마음을 접는 게 누군가에게 또 스스로에게 더 상처줄 일은 만들지 않는 일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돈다. 아마 내 친구가 이런 식의 생각을 하고 있다고 나에게 말했다면 단칼에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나 자신에게 그렇게 말해줘야겠다.